가톨릭 뉴스

8/12-<2> [대한난민 정착기] ① 난민 인정, 그 후···밥벌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재생 시간 : 03:49|2022-08-12|VIEW : 161

[앵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난민을 받아들인 건 1994년입니다.이후 28년 동안 7만 4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그 가운데 단 1.5%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는데요.바늘구멍을 통과한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CPBC는 난민 인정자들의 정착을 짚어보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먼저 난민이 처한 노동 환경을 김형준...


[앵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난민을 받아들인 건 1994년입니다.

이후 28년 동안 7만 4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단 1.5%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는데요.

바늘구멍을 통과한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CPBC는 난민 인정자들의 정착을 짚어보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난민이 처한 노동 환경을 김형준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그림1]]
[기자] 이집트에서 기자였던 칼리드씨는 최근 구직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일하던 광학제품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겁니다.

칼리드씨와 같은 난민은 주로 브로커를 통해 일을 구하지만, 계약서를 쓰지 않아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칼리드 엘가리브 / 난민 인정자, 이집트 출신>
"정규직을 구한대서 가 봤더니, 공장은 열흘짜리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거예요."

난민 신청자는 단순노무직에만 종사해야 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으면 직종에 제한 없이 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칼리드씨같은 난민 인정자도 전국을 떠돌며 일자리를 구하는 게 현실입니다.

사실상 정부의 구직 지원을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난민 정책 주무부처인 법무부의 인정자 정착 예산은 전무합니다.

<김연주 / 난민인권센터 변호사>
"이주 노동자 취업 연계 시스템에도 잘 편입되지 못하기도 하고 난민 인정자 처우를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그런 처우협의회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어요."

칼리드씨와 함께 기자로 일했던 아내 샤이마씨는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샤이마씨는 쿠데타 이후 군부의 언론탄압이 거세지면서 남편과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는 학위까지 받은 언론 전문가지만, 한국에서 경력을 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난민법에 따라 본국의 학위나 자격을 인정하지만, 노동현장에선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샤이마 사이드 / 난민 인정자, 이집트 출신>
"다시 펜을 잡고 기자가 되고 싶어요."

난민 인정을 받은 지 13년이 지난 저스틴씨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병원을 찾습니다.

[[그림2]]
최근 일하던 닭 가공 공장에서 사고를 당한 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저스틴 무누눌레 / 난민 인정자, 우간다 출신>
"이쪽 손가락이 같이 기계에 끼어버렸어요. 빼 보려고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팍'' 소리가 나더니 손가락이 부러지고 기계로 들어가 버렸어요."

하루 치료에 내야하는 비용은 8만 원가량.

회사는 수술비만 보상했을 뿐 치료와 재활에 드는 추가 비용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습니다.

현재 수입이 없는 저스틴씨는 병원 가기가 망설여집니다.

공장에서 일하기 전 저스틴씨는 본국에서 초등교사였던 경력을 살려 영어 강사가 됐지만, 학원은 차별의 현장이었습니다.

원장은 우간다 국적인 저스틴씨를 학생들에게 영국인이라고 속였습니다.

<저스틴 무누눌레 / 난민 인정자, 우간다 출신>
"(한국인 동료가) ''저스틴! 저도 영국인데! 영국 어디서 오셨어요?'' 이러는 거예요. 이제는 저를 우간다 사람으로 채용하는 일자리가 있을 때만 일해요."

중년의 아프리카 출신 난민 저스틴씨는 재활 후 다시 구직해야 하지만 앞날이 막막합니다.

구직과 차별, 산재에 이르기까지.

맨몸으로 노동시장에 던져진 난민이 ''난민 비호국'' 대한민국에서 겪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CPBC 김형준입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