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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늦게서야 깨달은 반복의 미학(최영일, 빈첸시오,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

[시사진단] 늦게서야 깨달은 반복의 미학(최영일, 빈첸시오,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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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1 발행 [1675호]



여름 더위의 상징 같은 삼복이 다 지나고, 처서가 다가왔다. 길고 지루할 것 같았던 여름도 이제 꼬리만 남은 셈이다. 애매한 장마와 함께 간간이 위세를 떨치는 폭염에 걱정하다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놀라다가 하는 심리적 불안의 와중에 여름의 시간이 지나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해의 계절을 기억할 때 단서가 되는 어떤 ‘태그(tag)’를 통해 전체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훗날 올여름은 어떤 키워드의 각인으로 쌓인 세월 속에서 기억을 길어 올리게 될까?

필자의 경우 여름 하면 휴가이고, 그 해에 떠났던 휴가지, 가방 속에 담아 가 읽었던 책들, 여름 극장가에서 흥행 화제가 된 영화작품, 이런 것들이 흘러간 시간의 태그가 된다.

이번 광복절을 전후해서는 김훈 작가의 신작 「하얼빈」을 읽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하얼빈역 처단을 사건 관련자들의 동선과 시선에 따라 담담하게 엮은 역사 실화소설이다. 그 시대, 그 처지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마음들이 스산하고 헛헛했다. 김훈 작가의 글은 늘 간결하지만, 안중근의 행동뿐 아니고, 신앙적 고뇌와 내면의 충돌이 무거워 사유할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고 있다. 예전에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이 조급했기에 하나의 책을 놓으면 새로운 책을 펼쳐야 했다.

필자는 여름에 극장을 자주 찾는 편이다. 영화 성수기라 블록버스터를 비롯해 국내외 흥행작들이 많이 개봉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 두 시간 내외 시원하게 다른 세상에 빠져 피서로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초여름에 ‘탑건’ 속편을 보았다. 1986년 대학 2학년 때 전편을 재미있게 보았고, 이듬해 공군으로 입대해 전투비행단에서 항공정비병으로 복무한 인연에 36년 만에 나온 속편을 아니 볼 수 없었다. 속편의 완성도도 높았고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나이 들어가는 세대로 주인공과 공감할 대목도 많아 좋았다. 그래서 다음에 아이들을 데리고 또 봤는데 또 재미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처음 볼 때는 재미는 있었지만 기대와 달라 낯설게 느낀 작품이다. 몇 주 후 다시 보니 주인공 남녀의 심리가 묘한 대사로 팽팽하게 얽히는 흥미로운 수작이었다.

국내 1위 흥행대작 ‘명량’의 속편(역사적으로는 명량해전보다 이전에 벌어진 한산대첩이다) ‘한산’을 보았다. 무표정하고 담담한 박해일의 이순신이 좋았다. 박해일은 헤어질 결심의 해준씨가 아니라 그대로 이순신 같았다. ‘한산’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이 호불호 갈렸다. 장단점에 대한 의견들이 각각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한산’을 또다시 보았다. 비로소 복잡 다양한 디테일이 눈에 잘 들어왔다.

우리가 잘 아는 배우, 이정재가 주연뿐 아니라 각본과 감독까지 맡은 ‘헌트’를 보았다. 80년대를 배경으로 실제 겪었던 아웅 산 테러 사건과 이웅평의 미그기 월남 등을 가상으로 엮어 흥미롭게 보았다. 하지만 남북의 세력이 대통령 암살을 위해 공조한다는 설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져 후반부 몰입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두 축을 이끄는 이정재, 정우성의 캐릭터가 팽팽하게 다가오며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느껴져 좋았다.

올여름은 책과 영화 등 문화 콘텐츠를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는 반복의 미학을 새삼 느끼며 뒤늦게 교훈을 얻는다. 보고 또 보고 자꾸 보면 내 것이 되고, 아름다워진다.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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