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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이 글을 써 보냅니다” (1요한 1,4) (최진일, 마리아, 생명윤리학자)

[시사진단]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이 글을 써 보냅니다” (1요한 1,4) (최진일, 마리아, 생명윤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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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발행 [1664호]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습관을 제2의 본성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습관 하면 왠지 부정적인 억양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마도 나쁜 습관에 빠져들게 되면, 고치기 어려우므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좋은 습관은 어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정리 정돈 잘하기” 등처럼 좋은 생활 습관은 스스로 삶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습관이라는 것이 꼭 생활적인 면에서만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최근 한 신부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이다. 그 신부님과 잘 아는 자매님이 대화 도중,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밝은 톤으로 “애를 지웠어요”라고 하는 말하더라는 것이다. 신부님은 아마도 죽음의 문화가 이 사회 속속들이 배어들어 죄책감을 상실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대방의 모습에서 순간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셨으리라. 그렇게 행동하기에 앞서, 그렇게 말하기에 앞서, “잠시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다”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서” 그 행동이, 그 말이 타당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그 순간에 반드시 필요한 성찰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던져 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잠시 멈추게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바로 교회 구성원인 우리를 말한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잠시 멈춤”의 성찰은 단 한 번에 길러질 수 없기에,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일찍 일어나기”처럼 성찰은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습관이 제2의 본성으로 자리 잡아 이를 자연스럽게 실천하면서 최소한의 죄책감을 벗어던지지 않도록 말이다.

좋은 습관은 단순한 기계적인 행동이 아니다. 몸과 마음에 익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은 쾌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 충만을 말하고 있다. 이 즐거움, 이 충만에 맛 들이게 하는 것이 생명윤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생명을 향한 선택, 생명을 위한 선택에서 오는 충만은 분명 존재하며, 아마도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충만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인간 생명을 ‘충만함’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생명을 향한 선택, 생명을 위한 선택은 “생명의 충만성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22항) 이 생명은 배아와 태아만의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인간 생명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측량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말한다.

“인간은 현세적인 존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충만한 생명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소명이 지닌 숭고함은, 인간 생명이 현세적 측면 안에서까지도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2항)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명의 충만성에 대한 개방을 하루아침에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 충만성에 대한 개방을 위해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택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흘러나올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해서 형성되고 양육될 때, 그 충만한 종교적, 도덕적인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회칙의 말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1요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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