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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주님 부활 대축일 - 위대한 믿음의 도약

[생활속의 복음] 주님 부활 대축일 - 위대한 믿음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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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 발행 [1658호]
▲ 함승수 신부



신학교 입학 시험과목 중에 교리시험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금세 답을 적었는데, 한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무엇인가?” 주일학교 학생 때도, 교사로 봉사할 때도 주님의 부활은 당연한 진리라고만 생각했기에, 부활의 증거라는 개념 자체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결국, 고민 끝에,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문제의 모범답안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묻혀있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이 무덤 안에 있던 두 천사의 입을 통해 발설되고 있지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빈 무덤=부활’이라는 도식은 100% 입증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본 증인은 아무도 없으며, 어떤 복음사가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누가 예수를 무덤에서 꺼내 갔다’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부활의 증거는 애초에 무덤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무덤을 뒤질 게 아니라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복음은 그 장소를 ‘갈릴래아’라고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삶의 자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실 복음의 자리로 가야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빈 무덤에는 예수님의 얼굴에 덮었던 수건과 그분의 몸을 감쌌던 아마포가 가지런히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수건과 아마포를 걷어내지 않고 그냥 통째로 가져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정황은 주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어야만 빈 무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보이는 것이지요. 주님의 부활은 증거로 입증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신비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 신비를 제대로 깨달으려면 먼저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베드로처럼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물리적, 수동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을 일으키는 이유, 본질, 의미의 차원을 영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요한이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음에도 그저 ‘빈 무덤’을 본 것만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에게 보여주시려는 의미를 찾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믿는 사람만이 이성과 논리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믿음의 도약을 ‘파스카’라 부릅니다. 부활을 가리키는 파스카(Pascha)란 말은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건너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희생할 줄 아는 삶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의 삶에서 이웃의 슬픔과 눈물을 내 것으로 여기는 공감과 나눔의 삶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세상 것에만 목숨을 거는 지상 시민의 삶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너그럽고 여유 있게 바라보는 천상 시민의 삶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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