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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학생이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잠시, 조선행 여정은 틀어지고

두 신학생이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잠시, 조선행 여정은 틀어지고

[신 김대건·최양업 전] (23)남경조약 참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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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발행 [1632호]
▲ 신학생 김대건은 남경 보은사 9층 유리탑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편지에 남겼다. 그림은 요한네스 니호프가 그린 남경 보은사와 9층 유리탑.



남경조약 내용

남경조약은 제1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에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제3자인 세실이 보기에도 조약 내용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남경조약 내용은 이랬다.

제1조 청국ㆍ영국 간의 평화와 우호를 약정하고 상대국 영토 내의 인명과 재산에 대한 충분한 안전 보장과 보호를 약정한다.

제2조 영국 신민(臣民)과 그 가족들이 아무런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면서 거주할 수 있게 청의 다섯 개 도시(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를 개항한다. 동시에 이들 도시마다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게 허용한다.

제3조 빅토리아 여왕과 그 후손들이 영구히 홍콩 섬을 소유하고, 그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지배하도록 한다.

제4조 광주로 운반되어 폐기됐던 아편의 대가로서 청이 600만 달러를 낸다.

제5조 광주의 공행(公行) 독점 체제를 철폐하고, 앞의 다섯 항구에서 영국 상인들이 누구든 그들이 원하는 상대와 교역을 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청은 주요 공행의 빚을 해결하는 데 300만 달러를 낸다.

제6조 최근의 전쟁으로 입은 재정 손실에 대한 부담으로서 영국에 1200만 달러를 더 내되, 1841년 8월 1일 이래 청국 내의 시ㆍ읍에 대한 배상금으로서 이미 영국이 받은 금액은 모두 제외한다.

제7조 제4~제6조에서 약정된 2100만 달러를 1845년 말까지 네 번에 나누어 내되 2회부터는 이전 납부액의 연 5%에 해당하는 이자가 가산된다.

제8조 인도인이든 유럽인이든 영국 신민인 모든 죄수를 즉각 석방한다.

제9조 영국인과 거주했거나 거래했거나 영국인을 위해 일했던 모든 중국 신민을 무조건 사면한다.

제10조 제2조에서 열거한 다섯 개 항구에서 모든 상인은 공정하고 정규적인 항구 출입 관세 및 기타 세금을 내야 한다.

제11조 이전에 외국인들에게 사용을 강요해 왔던 청원이나 탄원과 같은 용어 대신에 앞으로 영국과 청국 사이의 공문서에서는 통보, 성명, 선포처럼 경멸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한다.

제12조 배상금의 첫 번째 분할 납부금을 받으면 영국군은 남경과 대운하를 떠날 것이며, 더이상 청국의 무역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지 않을 것이다. (조너선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199~200쪽 참조)

▲ 남경조약 문서문.



남경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갖고, 청이 전쟁 배상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그리고 영국 상인을 위한 다섯 개 항구가 완전히 개방될 때까지 군대를 주산열도에 주둔할 수 있게 됐다. 세실은 영국이 청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남경 관광

세실은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는 냉철했다. 급히 귀환하면 영국이 프랑스를 가장 먼저 경계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쏠리는 영국군의 경계를 피하고자 남경조약식 연회에도 참석하고, 조약식이 끝난 뒤에도 다음날 김대건을 비롯한 일행과 함께 남경 시내를 관광했다. “남경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김대건 신부가 1842년 12월 9일 요동 백가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신학생 김대건은 프랑스 장교들과 함께 남경 시내를 돌아본 후 보은사(報恩寺)에 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김대건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앞의 편지에서 보은사 9층 유리탑에 관해 자세히 묘사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그 모양은 팔각형이고, 150개의 작은 종들과 2개의 금구슬이 있고, 그 밖에도 눈에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는데, 이 등들 덕분에 위로는 33천(하늘)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미신같이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무게가 900근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두 개와 천반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50근의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온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그 무게가 3600근에 달한다고 합니다.”(앞의 편지)

김대건이 감탄하고, 유럽인들이 ‘중세 7대 세계 불가사의’로 꼽은 보은사 9층 유리탑은 안타깝게도 1856년에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보은사 유리탑의 흔적은 박물관에서 일부 잔해만 볼 수 있다. 전체 모습은 김대건에 앞서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절단으로 중국에 와서 보은사를 방문했던 요하네스 니호프가 그의 여행기에 남긴 보은사 9층 유리탑 그림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 신학생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가 타고 오송에 온 프랑스 무장함 파보리트호.




에리곤호 마카오로 귀환

한편,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머물고 있던 아돌프 필리베르 뒤부아 장시니(Adolphe Phillbert Dubois de Jancigny) 프랑스 전권대사가 아편전쟁 전황을 듣고 1842년 7월 17일 18개 대포로 무장한 파보리트호를 타고 홍콩을 거쳐 장강 하구로 곧장 북상했다.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도 파보리트호에 탑승했다. 파보리트호는 8월 6일 주산도에 정박한 후 8월 27일 에리곤호가 있는 오송에 도착했다. 장시니 대사는 세실 함장 일행이 8월 29일 열리는 남경조약식 참관을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를 하선시킨 후 남경으로 떠났다. 하지만 장시니는 남경조약식을 참관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파보리트호는 9월 17일이 되어서야 남경에 도착했다.

세실 함장과 김대건을 비롯한 수행원은 남경조약식 후 이틀간 남경 시내 관광과 지자기 관측을 한 후 중국 배로 다시 에리곤호가 있는 오송을 향했다. 오송으로 가던 중 파보리트호를 만났다. 이 장면은 세실의 머리에 없던 그림이었다. 파보리트호를 본 세실은 무의식적으로 거친 욕을 내질렀다. 세실은 양자강을 거슬러 오고 있는 파보리트호 파즈 함장을 힐난했다. 이제 막 종전한 전쟁터에 제3국의 군함이 진입한 것은 극히 위험하다고 몰아쳤다. 또 관측 해로도 없이 군함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온 것은 무모하다고 비난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화를 냈지만 사실, 세실은 무엇보다 영국과 청에 중립적 태도를 보이면서 조약식에 참가해 청에 대한 프랑스의 어떤 이익을 챙길까 간파하려 했던 자신의 의도가 무산될까 봐 화가 난 것이었다. 세실은 2월부터 6개월여 동안 영국군의 뒤를 쫓으며 아편전쟁의 전황을 살펴왔기 때문이었다.

세실과 김대건 일행은 9월 9일 오송에 도착했다. 서둘러 에리곤호에 승선한 세실은 장교들을 모았다. 그는 장교들에게 곧 떠날 것이니 출항 준비를 서두르라고 명령했다. 에리곤호는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을 오송에 내려놓고 마카오로 급히 떠났다. 프랑스는 2년 후 1844년 10월 청을 굴복시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에서 가톨릭을 완전히 허용하는 도광제의 칙서를 받아낸다.

한편, 김대건은 양자강에서 만난 파보리트호 장교로부터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가 오송에 도착해 에리곤호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대건은 당시 심정을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앞의 편지 참조)

김대건은 세실 함장이 오송에 도착하면 조선이 아닌 마카오로 돌아갈 것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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