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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조선 신학교’ 왜 마카오였을까

최초의 ‘조선 신학교’ 왜 마카오였을까

[신 김대건·최양업 전] (11) 아시아 선교와 마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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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발행 [1620호]
▲ 포르투갈 왕정과 마카오 총독부는 선교 보호권을 내세워 교황청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을 많이 제약했다. 왼쪽 사진은 마카오 미니어쳐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9세기 중반 마카오 모습. 오른쪽은 마카오 루아 산토 안토니오 거리에 자리한 옛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현재는 5층 주상복합건물로 개조돼 있다.



한국가톨릭교회사의 대가였던 고 최석우 몬시뇰은 평소 신학자와 사학자들의 한국 교회사 서술에 있어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나는 김대건 신부의 역사 서술에 있어 세계 교회사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예로 1837년 마카오 민란으로 대표부의 신부들이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닐라로 피난했다는 대목을 제시했다. 최 몬시뇰은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민란이 아니라 ‘포르투갈 보호권’ 때문이었음을 강조했다. 선교 보호권으로 말미암아 포르투갈 왕정과 선교사들이 교황청이 파견해 중국에 진출하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적대시했고,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축출하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최 몬시뇰은 이러한 세계 교회사적 배경을 고려했다면 ‘민란으로 인한 마닐라로의 피난’이라는 오판은 충분히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황청이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아래에 있는 북경교구에서 독립한 요동대목구를 설정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위한 만주 길이 열리게 됐다는 역사적 배경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하나로 최 몬시뇰은 지금까지 김대건 신부의 역사 서술이 ‘영웅주의’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김대건은 동창인 최양업과 최방제에 비해 능력과 판단 면에서 뒤떨어져 마카오 신학교 교수 신부들에게 많은 걱정을 안겨줬는데도 한국 교회사에서는 완벽한 인간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면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 인간적으로 완성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최 몬시뇰은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서도 약점을 극복해 자신을 인간적으로 완성하고 나아가서 순교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한 그의 영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선교 보호권과 마카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시절을 살펴보기에 앞서 고 최석우 몬시뇰의 우려를 다시 끄집어낸 것은 지금도 세 신학생의 마카오 시절에 대해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 성당을 순례하면서 조선 복음화의 호연지기를 키웠다던가, 마카오 신학교에서 라틴말과 프랑스말, 중국말을 능통하게 배웠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단언컨대, 조선 교회 세 신학생의 마카오 생활은 자유롭지 못했다. 최석우 몬시뇰의 지적대로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때문이었다. 비오 2세 교황(재위 1458~1464)은 1461년 포르투갈 아폰수 5세 왕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선교 보호권’을 줬다. 이후 포르투갈 왕들은 두 대륙 가톨릭교회의 실질적 책임자가 됐다. 포르투갈 왕들은 자신이 파견한 선교사 외에는 누구도 선교 보호권 관할 내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19세기 초ㆍ중반까지 포르투갈 왕과 그의 선교사들은 중국과 아시아 가톨릭교회를 좌지우지했다.

마카오는 중국 광동성 중산현 남단의 반도로 본래 지명은 ‘오문’(澳門)이다. 신대륙 발견 이후 중국에까지 진출한 포르투갈은 1537년부터 마카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이 일대 해적들을 퇴치한 공로를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1557년부터 마카오에 상업기지를 세울 수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 왕정은 1576년 자국 선교 보호권 아래 마카오교구를 설정하고, 중국 전체를 관할했다. 이때부터 포르투갈 예수회와 아우구스티노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많은 선교사가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다. 교황청 포교성성의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는 1732년이 되어서야 마카오에 극동대표부를 설치하고, 태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코친차이나 지역을 선교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늘 갈등을 빚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겪었던 고초이다. 포르투갈 선교단 특히 북경교구장 서리였던 남경교구의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중국 신자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를 돕지 못하게 명령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길 안내나 숙식을 제공하면 파문하겠다고까지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사목하는 지역에서 중국인 신자들에게 물 한 모금조차 얻어먹을 수 없었다. 오히려 폭행당하고, 감금되고, 내쫓기는 수모를 당했다.

포르투갈 마카오 총독부 역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극히 비협조적이었다. 극동대표부 건물에 비가 새 수리 허가를 요청했지만, 총독부가 허가하지 않아 결국 천장이 내려앉은 일도 있었다. 총독부의 횡포에 참다못한 파리외방전교회는 극동대표부를 1847년 영국령 홍콩으로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세 신학생이 마카오를 자유롭게 다니며 문물을 배우고,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아래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을 비롯한 여러 성당을 왕래하면서 전례에 참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마카오의 상징이 된 예수회 성 바오로 성당은 조선인 세 신학생이 마카오에 도착하기 2년 전인 1835년 화재로 소실돼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두 번은 포르투갈인들의 성당을 찾았을 수 있지 않았겠냐 반문하겠지만, 무지하고 고집스러운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런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교황청 포교성성이 설립해 프랑스 라자로회가 운영하던 ‘성 요셉 신학교’는 조선인 세 신학생이 방문했을 수 있었다고 본다.


▲ 19세기 화재로 소실된 마카오의 성 바오로 성당 전경.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때부터 1842년 2월까지 햇수로 6년을 마카오에서 수학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는 오늘날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의 카모에스 공원 입구 옆자리에 있었다. 바로크식 2층 석조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847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한 후 카노사의 사랑의 수녀회가 매입해 보육원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5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 극동대표부 건물 안에 ‘조선 신학교’를 운영한 것도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또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조선 국경과 가까운 요동 땅에 신학교를 세울 뜻이 있었기에 조선인 세 신학생을 페낭 국제 신학교로 보내지 않고 당분간 극동대표부에서 교육하기로 했을 것이다.

최초의 조선 신학교에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교육한 이들은 칼레리ㆍ리브와ㆍ데플레슈ㆍ베르뇌ㆍ메스트르 신부였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훗날 부제품을 받기 전 소팔가자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신학을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마카오 극동대표부 조선 신학교 교수 신부 대부분은 조선으로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 선교사들이다. 곧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조선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부터 사제로 양성됐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교수 신부들이 16살의 동생 같은 세 소년을 보고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이들의 눈에 세 신학생은 놀랄 만큼 순박할 뿐 아니라 신심과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정도로 완전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승과 제자이기보다 머지않은 시간에 함께 조선 선교에 헌신할 동료로서 세 소년을 아낌없이 돌봤다. 메스트르 신부와 베르뇌 주교의 편지를 보면 김대건과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은 후 동료로서 대하고 존중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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