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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눈 감으면 훤한 북녘 내 고향… 그리운 마음에 밤낮으로 기도

지금도 눈 감으면 훤한 북녘 내 고향… 그리운 마음에 밤낮으로 기도

월남 수도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오숙·박숙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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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0 발행 [1618호]
▲ 요즘도 매일 같이 오전 오후를 고향 땅 평양과 황해도 수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도로 소일한다는 강오숙(왼쪽), 박숙자 수녀.



한 삶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새싹이 돋아나야 잊힐까. 하느님 곁으로 갈 날이 다가올수록 고향 땅이 눈에 밟힌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 번호 5번 강오숙(루갈다, 98) 수녀와 27번 박숙자(콘쳅다, 91) 수녀도 늘 고향 가는 꿈을 꾸곤 한다. 고향 집으로 들어가는 토담과 사립문, 기와집과 툇마루를 오가던 추억을 어찌 잊을까. 어머니가, 아버지가 금세라도 문을 열고 나올 듯 정겹다.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아 이제는 노년기 사도직도 손에서 내려놓고, 용인 수지 성모의 집에서 안온한 노후를 보내는 터라 아쉬울 게 없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앞두고 두 수도자를 만나 평양과 황해도 수안군에서의 유년시절과 신앙생활, 월남 과정을 들었다.



천당에서 만나자며 가족과 이별

강오숙 수녀는 여전히 억척이다. 자신이 사는 성모의 집을 짓느라 진 빚을 갚기 위해 앞치마, 성작 수건을 만들다가 후배 수녀들로부터 “제발 그만하세요” 하는 핀잔까지 듣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 1ㆍ4후퇴 때 월남, 재봉틀을 돌려 손수건을 만들고 미군들에게 1달러에 팔며 수도회를 재건한 기억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매일 오전이면 서너 번, 오후에도 서너 번씩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지만,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자신이 평양을 떠나올 때 헤어진 큰언니(강숙부 마리아)를 떠올리면 더 그렇다. 월남하자고 권유하는데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춘 채 “천당에서 만나자”고 하던 말을 어찌 잊으랴. 2006년 4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방북 때 언니가 살던 평양 관후리 집을 지나쳤는데, 흔적도 없었다. 훗날 북한에서 벌어진 ‘6ㆍ9 인민 교체’ 때 큰언니는 형부(최성근 바오로)와 함께 일가가 모두 함경도 오지로 추방됐다는 얘기만 우연히 전해 들었다.

강 수녀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 괴천리 75번지다. 메리놀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 한국 풍습과 한글을 익히던 영유성당 바로 아랫집이다. 유아 세례를 받아 ‘마르타’로 불리던 강 수녀는 길 건너 층층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나오는 북문을 지나 널찍한 성당 마당에서 고아였던 김 골룸바와 놀았다. 수녀원 마당으로 갔다가 메리놀 수녀회 수도자들에게 과자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때 셋째 언니(강 아가다)가 시집을 가려고 예단을 준비했고, 그걸 보러 수녀들이 왔다가 “마르타도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라”고 했는데, 강 수녀는 “나도 수녀님 되려고 합니다” 하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래도 놀리듯 시집가라는 농담에 시집 안 간다며 수녀원 간다고 울던 마르타가 12년 뒤 수녀원에 와서 그 수녀를 다시 만났다. 바로 서 실베스텔 수녀였다. “마르타야, 약속을 지켰구나. 성녀 되어라.” 강 수녀는 지금도 실베스텔 원장수녀가 그립다.

강 수녀는 4대째 구 교우 집안이다. 사랑방에서 교리를 가르쳐줬던 할아버지(강재찬 시몬)는 36년 동안 전교 회장을 지냈던 인물.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쌍투스(Sanctus, 거룩하시다)’라고 부를 정도로 강 회장은 신앙에 열심을 보였는데, 강 수녀의 아버지(강기범 타대오)가 갑자기 타계하자 손자 손녀들 신앙교육을 위해 성당 아랫집으로 이사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조과(아침기도)와 영성체전송을 하고, 온 가족이 다 같이 성당으로 올라가 새벽 미사를 드리고 종일 기도문과 요리강령과 천자문, 바느질, 재봉질을 익혔다. 훗날 수녀원에 들어가 보니 배울 게 없었다.

그러다가 인천 박문학교 교감이던 큰오빠(강안숙 요셉)가 평양 성모학교 교무주임(교장대리)으로 오면서 강 수녀도 평양으로 이사했다. 그때 살던 집이 평양의 상수구리 257번지다. 자연스럽게 강 수녀도 성모학교로 전학했고, 17세에 수녀원에 입회하게 됐다. 당시 원장수녀가 메리놀 수녀회 장정온(악니다) 수녀였는데, 강 수녀를 ‘막내딸처럼’ 끔찍이도 예뻐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서포수녀원으로 왔지만, 어찌나 먹을 게 없었는지 “배고파 죽겠네” 하고 잠꼬대를 했을 정도였다. 옆에서 잠꼬대를 듣던 수녀가 울었다고 한다. 그런 풍전수전 다 겪고도 살아남은 수도회가 1950년 5월 14일 해산된 데다 그해 10월 장 악니다 수녀 등이 피랍돼 순교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힘겨웠을까. 해방 직전인 1944년 1월 첫 서원한 강 수녀는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숙부인 이재호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기림리본당에서 4년간 사도직을 했다. 이 신부와 장 수녀가 피랍됐다는 소식도 기림리본당에서 들었다. 마음대로 출입도 못 하고 서포수녀원에 갇혀있다시피 하다가 수녀회가 해산되자 강 수녀는 평양 본가에 있다가 평양 수복과 함께 다시 모인 회원들 넷이서 김장을 하다가 1ㆍ4후퇴 때 미군 차량을 타고 월남해 수도회를 재건했다.



북녘 본당에서의 어릴적 추억 잊지 못해

박숙자 수녀는 황해도 수안군 대오면 시리원리 출신이다. 사창본당 관할 시리원리공소를 박 수녀의 아버지(박영두 바오로)가 지었고, 공소회장도 아버지였다. 사창본당 관할 사창국민학교를 다녔던 박 수녀 역시 엄격한 신앙적 훈육 속에서 자라났다.

“당시엔 집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생활을 했어요. 공과책을 가지고 와서 기도했는데, 실은 아주 지겨웠어요. 그래도 그때의 신앙살이가 바탕이 돼서 1ㆍ4후퇴 뒤 월남해 수녀원에 들어왔어요. 지겨웠지만, 삶으로 기도가 들어왔던 것이지요.”

해방 뒤 6년제 공립 사창중학교를 나와 교사가 되려 했지만, 교원자격 심사 때 ‘천주교’라고 적은 이력 탓에 교원으로 임용되지 못했다. 심사하던 오빠 친구가 “그거 안 쓰면 안 되겠느냐?”고 했지만, 천주교 신자라는 걸 안 밝히면 배교하는 줄 알았던 박 수녀였기에 임용지원서 종교란에 기꺼이 ‘천주교’라고 적고 임용에 탈락했다.

“부농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어서 공산당의 박해에도 집에 십자고상을 걸어놓고 살았습니다. 인민위원회에서 우리를 함경도로 추방하려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막는 바람에 추방되지 않았지요. 신앙인으로서 부모님이 잘사셨던 듯합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1ㆍ4후퇴가 진행되면서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성과 서울, 수원, 온양을 거쳐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1952년 입회, 1960년에 첫 서원, 1969년에 종신서원을 했다.

북한에서 산 세월은 20년 남짓 이지만 박 수녀는 지금도 사창성당과 시리원리공소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도 밤낮으로 고향에 남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고향이 얼마나 그리운지, 꿈에도 보여요. 황해도 수안군은 오곡이 풍부하고 특히 배나무가 많은 곳이에요. 전교 수녀가 돼 전국 방방곡곡 안 가 본 데가 없지만, 고향만큼 좋은 곳은 못 봤어요. 어머니(최목자 데레사)도 서울 출신이신데, 수안 만큼 좋은 데를 못 봤다고 했지요. 고향 땅에 다시 가보게 될지, 아득합니다. 수난의 땅 한반도에 평화를 주시길, 북녘 형제들과 다시 상봉하게 되길 하느님께 더 열심히 기도할게요.”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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