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신부의 무릎은 닳고 닳아야 한다

[미카엘의 순례일기] (23)한 사제의 첫 성지순례

Home > 사목영성 > 미카엘의 순례 일기
2021.06.13 발행 [1617호]
▲ 성지 순례 중인 사제가 겟세마니 대성당 바위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몇 해 전 신부님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 분이 “이 친구는 한 번도 순례를 간 적이 없는 걸로 유명하다”며 맞은 편에 계신 신부님을 가리키셨습니다. 그윽한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는 버릇 때문에 “혹시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으신다는 온화하고 조용한 분이셨습니다.

“본당 신부는 그저 본당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순례를 가면 나머지 본당 식구들은 목자 없이 그 시간을 지내야 하잖아?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다고 순례를 다녀오시는 다른 신부님들이 본분을 어긴다는 말은 전혀 아니야. 내가 좀 괴팍한 거지. 열흘 동안 엄청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주 오랜만에 뵌 것이었는데도 신부님은 예전과 다름없으시더군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묵묵히 지키며 물 흐르듯 사는 분이셨지요. 이야기를 마치면서 저는 가까운 일본 순례도 의미가 있으니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를 권했습니다. 순례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하느님, 그리고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분들이 계시기 마련이니까요. 신부님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신자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로부터 1년쯤 흐른 후, 신부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본당 신자들과의 일본 순례를 기획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긴 시간을 내기는 마음이 허락지 않지만, 휴가를 이용하면 주일을 거르지 않을 수 있다 하시기에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나가사키 지역을 순례지로 정하고 일정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이런 건 미카엘이 잘 만들어줬겠지. 그냥 이대로 하자구. 그런데 특별히 내가 따로 준비할 일이 있나? 난 앞에 나서지 않고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고 싶어.”

태어나 처음 떠나는 순례이니 신부님의 얼굴에는 설렘과 걱정이 함께 느껴졌습니다. 그런 신부님께 혹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저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좋은 숙소나 맛있는 식사, 아름다운 성당,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순례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것들보다 훨씬 순례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공통점이 있었어요. 사실 제가 신부님께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지만요.”

신부님께서는 귀를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앉으셨습니다.

“신부님들께서는 모두 순례를 위해 애쓰십니다. 좋은 강론을 준비해 오시고, 신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시고, 저녁때마다 신자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려고 노력하시고…. 그런데 순례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지도 신부님께서 성지를 어떤 마음으로 방문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험으로는, 순례지에 도착했을 때 지도 신부님께서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순례가 언제나 풍요롭고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

신부님께서는 두 손을 모으시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기셨습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질 무렵, 신부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입을 여셨습니다.

“나는 말이지, 신부의 무릎은 닳고 닳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릴 적 새벽 미사에 참여하러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 가서 문을 열면, 한겨울의 냉기가 가득한 성당 맨 앞줄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매일 같이 성무일도(시간전례)를 바치시는 주임 신부님을 뵐 수 있었어. 그 모습 때문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던 거야. 사제품을 받을 때도 온몸을 땅에 대고 하느님과 신자들에게 봉사한다고 약속했고, 무릎을 꿇고 선배 신부님들의 축복을 받았어. 사제의 무릎이 땅에 자주 닿을수록 사제다워지는 법이지. 미카엘은 나에게 어렵게 한 이야기겠지만, 사실 그거야말로 아주 쉬운 일이야.”

순례 기간 내내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지으시며 그저 순례에 집중하시고, 자주 순례단과 함께 성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신부님께서는 가끔 저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저는 허물없는 사이라고 생각해 주제넘은 이야기를 드렸다는 생각에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신부님과 함께했던 그 순례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제의 맘은 예수 맘, 우리를 애써 돌보시며 어디서나 길 잃은 양 주님께 인도해 주시네.

사제의 맘은 예수 맘, 인류의 고통과 번민을 기꺼이 받아 지시고 주님의 십자가 따르네.

사제의 맘은 예수 맘,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 복음 말씀 전하시며 우리게 축복을 주시네.

오 착한 목자 예수여! 네 사제를 축복하사 거룩하게 하시옵고 네 사제 되게 하소서.”(가톨릭 성가 300번, ‘사제의 마음’)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