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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소년, 중국 내륙 길 걸어 6개월 만에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

세 소년, 중국 내륙 길 걸어 6개월 만에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

[신 김대건·최양업 전] (8)변문에서 마카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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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발행 [1616호]



샤스탕 신부를 만나다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8일(또는 29일- 샤스탕 신부가 부모에게 쓴 편지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날짜를 28일, 29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 지대인 중국 변문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샤스탕 신부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에서 선교하다 본국으로 귀환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길 안내인으로 함께 한 조선 신자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현석문 등 4명이 함께 했다.

세 신학생과 일행은 무슬림이 운영하는 제법 편한 숙소에서 보름여 간 쌓인 여독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다. 세 신학생과 신자들은 샤스탕 신부에게 모방 신부의 안부와 편지 등을 전해주고, 조선 교회 상황을 설명했다.(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30일 변문에서 페낭 신학교 알브랑 신부와 동료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편지를 열어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세 신학생과 샤스탕 신부는 첫 만남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애정은 똑같이 사뭇 깊었을 것이다. 말은 비록 통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눈빛과 미소, 배려에 금방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혹한에 꽁꽁 언 몸과 마음을 단번에 녹여준 샤스탕 신부의 따뜻한 포옹은 아마도 세 신학생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위안이 됐을 것이다. 샤스탕 신부는 알브랑 신부와 페낭 신학교의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 소년들을 가엽게 여기시리라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과 동정심을 잘 알기에 부탁드리니, 부디 소년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다시 이들의 조국으로, 저희 앞으로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세 신학생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마음을 전했다.

세 신학생과 샤스탕 신부는 하루 또는 이틀간 함께 지내며 정을 쌓은 후 12월 30일 다시는 지상에서 만나지 못할 작별을 했다. 이날 세 신학생은 중국 옷으로, 샤스탕 신부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서로의 길 안내인들과 함께 반대편 길을 향해 걸어갔다.



마카오를 향한 유학 여정

샤스탕 신부는 1834년부터 중국 요동과 산동 지역에서 2년여간 사목해 비교적 이곳 지리에 밝았다. 샤스탕 신부는 조선의 세 신학생을 바닷길을 이용해 마카오까지 보내려 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요동에서 마카오로 가는 해로가 훨씬 안전하고 경제적이었다. 샤스탕 신부는 마카오에서 배로 중국 복안, 남경, 상해, 요동을 거쳐 북경과 산동 지역으로 왔다. “큰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요, 많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타인에게 부담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샤스탕 신부가 요동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36년 5월 1일 자 편지 중에서)

하지만 세 신학생의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유학 여정은 샤스탕 신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샤스탕 신부가 조선 교회에서 사용할 전례용품과 물품을 구해오기 위해 중국인 복사(길 안내인, 또는 파발꾼으로도 표현함) 돈 마르코와 고 요한 선생을 1836년 5월 산동에서 마카오로 떠나보냈다. 돈 마르코는 서만자 신학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조선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길 안내인을 자청한 그는 도덕성과 성실성을 갖춘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고 요한 선생은 라자로회가 마카오에서 운영하는 성 요셉 신학교에서 4년간 생활한 이로 순진하고 고지식했지만, 마카오로 가는 길을 잘 아는 믿음직한 길 안내인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바닷길로 마카오에 도착해 조선에서 사용할 물품을 받아 요동으로 돌아와 샤스탕 신부에게 전달하고, 조선의 세 신학생을 배로 다시 마카오까지 데려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이들을 해고해버려 샤스탕 신부는 다른 길 안내인에게 세 신학생을 맡겨야만 했다.

샤스탕 신부는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처사에 낙담해 조선에 입국한 후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와 부대표 바랑탱 신부에게 편지(1838년 10월 10일 자)를 써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표했다. “앞서 보냈던 돈 마르코와 고 요한이 배를 타고 돌아와 요동 지방에서 저와 만났더라면, 저는 이 두 사람에게 후보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안내하는 일을 맡겼을 것이고, 그랬다면 경비도 절약되었을 것입니다. 일을 잘하고 돈을 적게 쓰는 두 사람의 장점을 확인하신 신부님이 이들을 해고하셨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신학생을 중국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동행할 새 안내인들은 서만자 출신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이었다. 샤스탕 신부는 이들이 “강을 건너가기보다 채찍을 맞아 죽는 고집스러운 나귀처럼” 배를 절대 타지 않겠다고 고집 피워 계획한 해상 유학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세 신학생은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을 따라 심양을 거쳐 육로로 중국 땅을 걸어 6개월 만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조선 교회와 서만자 라자로회의 공동 파발꾼인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의 안내로 중국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유학길에 올랐다. 사진은 1840년에 봉헌된 서만자 옛 성당(왼쪽)과 오늘날 성당의 모습이다.



세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는 세 신학생의 예상 유학로 2개 노정이 지도에 표기돼 있다. 하나는 한양-의주-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남경-상해까지 육로로 이동해 상해에서 바닷길로 복주를 거쳐 마카오까지 가는 노정이다. 다른 하나는 한양-의주-변문-심양-북경-제남-남경-상해를 거쳐 배로 복주-마카오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기자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걸었던 ‘마카오에서 서만자까지의 여행 경로’에 주목한다. 먼저, 세 신학생은 변문에서 심양을 거쳐 서만자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 세 신학생을 안내한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은 조선 선교사들과 서만자 라자로회 물리 신부의 ‘공동 파발꾼’이었다. 이들은 서만자에 가서 물리 신부가 마카오에 보낼 보고서 등을 챙겼을 것이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마카오에서 산두-장주-남창-무창-하남과 산서대목구를 거쳐 서만자까지 중국을 종단했다. 이 여행 기간이 딱 6개월이었다. 이 여정 동안 페레올 주교와 동행한 중국인 길 안내인이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2대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왕 요셉이었다. 그리고 조선대목구와 서만자 라자로회 공동 파발꾼인 마리아노, 천 요아킴도 함께했다.

왕 요셉과 마리아노, 천 요아킴에 관해선 다음 회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그리고 이들이 세 신학생의 유학 여정 경비로 얼마를 썼는지 처음으로 소개하겠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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