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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한 옷차림과 어린아이 같은 미소… 벌써 많이 그립습니다

검소한 옷차림과 어린아이 같은 미소… 벌써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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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발행 [1611호]
▲ 허영엽 신부가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안치된 정진석 추기경의 시신 앞에 영정 사진을 올리고 있다.



▲ 허영엽 신부가 2018년 7월 19일 서울대교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일화를 모아 엮은 「추기경 정진석」을 정 추기경에게 선물하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특별기고 / 허영엽 신부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즉시 각막 기증을 위한 안구적출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병원의 수녀님들이 제의를 입혀드렸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으로 정 추기경님의 시신이 운구되었고, 밤 12시가 되자 성당의 조종이 울렸다. 명동대성당에 도착하여 신부님들에 의해 제대 앞으로 운구되었고 유리관으로 옮겨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정 추기경님의 이마를 짚었는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마치 주무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유리관을 덮기 전에 추기경님의 주교관을 씌워 드렸다.

지난 2월 22일 새벽 2시에 병원에서 소식이 와서 서울성모병원에 갔다. 정 추기경님의 병실. 정 추기경님은 매우 힘드신 듯 힘들게 눈을 뜨고 계시다가 나를 보시자 처음 하신 말씀이 “미안해”였다. 그 한 마디는 정 추기경의 인품이 그대로 배어 나온 말씀이었다. 오랫동안 지켜본 정 추기경님은 남에게 작게라도 폐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정 추기경님은 겉으로는 근엄하고 딱딱해 보이지만 조금 지나다 보면 겸손하시고 솔직하시다. 내가 추기경님께 “고통스럽지 않으시냐”고 하자 “조금 힘들고 아프지만 견딜만하다”고 하셨다. 주치의 선생님은 “정 추기경님은 엄청난 고통을 잘 참아내시는데 겉으로 잘 안 드러내셔서 안쓰럽다”고 했다.

2004년 3월 교구 홍보실로 발령을 받은 후 나는 처음으로 정 추기경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때 면담은 아주 짧게 끝났다. 그날 하신 정 추기경님의 말씀은 “소신껏 잘 일 해줘. 난 자네가 잘하리라 믿어”였다. 아주 짧은 말씀이었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담겨 있었다.

정 추기경님은 놀랄 정도로 검소하시다. 봄옷은 하나인 듯 늘 같은 옷을 입고 나오셔서 내가 장난처럼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이 옷은 언제 세탁하세요?” 그때 정 추기경님은 한 박자 늦게 파안대소를 하시며(항상 웃으실 때 한 박자가 늦다) “밤에 빨아 입지”라고 슬쩍 넘어가셨다. 한철이 아니라 나와 같이 산 거의 10여 년간 간절기에는 늘 한 가지 옷만 입으셨다. 언젠가 숙소에서 옷장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옷이 없어 허전할 정도였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교구청 구름다리를 걷고 3층까지 올라가는 2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정 추기경님은 수십 년 된 아주 허름한 가방을 들고 출근을 하셨다. 처음으로 내가 보고를 드릴 때 정 추기경님은 대뜸 내용보다 뒷장을 먼저 보셨다. 그리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 이면지를 사용 안 했어?” “아 네. 다음번에는 꼭 이면지를 사용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이면지 사용을 너무 강조하셔서 어떤 분은 일부러 이면지를 만들어 보고서를 드린다는 웃기지만 슬픈 말도 들었다. 다음에 또 이면지가 아닌 종이에 보고서를 드렸더니 바로 이면지 사용을 문제 삼으셨다. 나는 “이면지를 쓰면 오히려 프린터가 일찍 고장이 납니다. 그러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인 거죠”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 추기경님은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그럼 다음부터는 이면지를 쓰지 마”라고 하셨다. 여러 번 경험한 것이지만 정 추기경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라도 반대 의견이 합리적이면 자신의 생각을 금방 바꾸셨다. 실제로 나이 든 어른들이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 추기경님이 2004년 명동대성당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준비하실 때였다. 정 추기경님이 신부님들에게 의견을 물으셨다. “2시간이나 긴 강의를 하는데 조금 지루하지 않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겠나?” 누군가가 “노래를 하시면 어떻겠냐”고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 추기경님은 아주 좋은 방법이라며 즐거워하셨다. 그날부터 노래 선곡을 하시고는 연습을 하셨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 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최희준 선생의 ‘하숙생’과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로 정하셔서 악보를 보시고 자주 식당에서도 부르셨다.

그해 여름 청년성서모임 전체 미사에서 정 추기경님은 강론 중에 갑자기 노래선물을 하시겠다며 ‘하숙생’을 부르셨다. 정 추기경님의 노래에 미사에 참석한 청년들은 “와~~”하고 환성을 터뜨렸다. 명동대성당에서 강의에서는 두 곡을 다 부르셨다. 신자들은 무척 좋아했다. ‘하숙생’은 추기경님의 애창곡이 되었고 2007년에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하는 미사 때는 참여하신 고 최희준 선생님과 정 추기경님이 함께 노래를 부르셨고 그 장면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2006년 3월 24일 바티칸 광장은 37년 만에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정 추기경님의 모습이 보이자 그 많은 군중 가운데서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던 우리나라 순례단들이 환호성을 질렀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정 추기경님은 저녁 식사 후 나와 산책을 하면서 “교회의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그 기쁨이 며칠을 가겠는가. 그 이후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내 어깨를 누를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정 추기경님은 서임 발표 며칠 후 사석에서 자주 “두렵다”는 솔직한 표현을 했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가 너무 지나쳐 어깨가 무겁고 두려운 감정조차 든다는 말씀이었다. 그분의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산타클로스가 떠오른다. 산타클로스(Santa Claus)는 니콜라오 성인을 지칭하는데 공교롭게도 정 추기경님의 본명이 니콜라오이다. 하늘나라에서도 정 추기경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꿈과 희망을 배달하는 산타클로스가 되어주기를 기원한다. 벌써 그분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그리워진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주치의 김영균 프란치스코 교수


김영균(프란치스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사진>는 2월 21일 정진석 추기경이 입원한 때부터 65일 동안 추기경 전담 주치의로서 의료진들과 곁에서 치료를 도왔다.

정 추기경 선종 직후 빗속에 함께 구급차를 타고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당도한 김 교수는 병환 중의 추기경을 돌봤던 시간을 떠올리며 숙연한 표정으로 선종 미사에 참여했다. 김 교수는 미사 후 취재진과 만나 “의사로서 추기경님께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밝혔다.

“의사는 치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환자를 괴롭혀야 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추기경님 같은 환자는 처음 봤어요. 제가 추기경님께 ‘말씀하셔야 합니다’, ‘물 드셔 보세요’, ‘추기경님, 일어나 앉아보세요’, ‘약 드세요’하고 계속 말씀드렸는데, 추기경님께서는 철저히 의사의 말을 따라주셨고, 100% 신뢰해주셨습니다.”

김 교수는 “위독했다가 다시 회복을 세 차례 정도 반복하시면서 굉장히 힘드신 가운데에도 사제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하느님 만세’를 외치기도 하셨고, 한참 기력이 쇠하셨다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 곁에 있던 수녀님께 하신 첫 마디가 ‘평화를 빕니다’였다”면서 “의식이 있으실 때엔 명료하게 대화도 하실 정도였다”고 그간의 상황을 전했다.

김 교수는 “힘든 와중에도 하느님과 함께하셨던 추기경님께서는 ‘항상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게 사셨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아프실 때엔 아프다는 표현도 하셨는데, 저희가 그걸 잘 알면서도 온전히 해결해드리지 못한 채로 힘든 상황이 이어지니까 의사로서 한계도 느끼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하루 반 정도 깊은 수면에 드셨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굉장히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서 “추기경님께서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늘 염원하시고, 기도하셨기에 앞으로 우리가 이를 위해 계속 노력하는 것이 추기경님의 뜻을 이어받는 일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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