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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 영적 아버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 영적 아버지

정진석 추기경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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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발행 [1611호]
▲ 정진석 추기경은 계성보통학생 시절 명동대성당 보좌이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 미사 복사를 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사진은 정 추기경이 2008년 5월 성소 주일을 맞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을 방문한 주일학교 초등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1코린 9,22)’

고 정진석(니콜라오, 향년 90세)추기경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산 사제였다.

6·25전쟁 중 죽음의 참상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은 정 추기경은 사제수품 성구 “나 너를 사랑하는 줄을 너 알으시나이다(요한 21,15-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를 평생 가슴에 지닌 채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 위해 헌신한 착한 목자였다.

젊은 시절 발명가를 꿈꿨던 서울대 공학도. 그러나 모든 이에게 참 행복을 주는 봉사하는 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사람. 39세에 주교가 된 뒤 서울대교구와 청주교구의 교구장직을 40년 넘게 수행하며 막중한 사목적 현안을 두루 살핀 추기경.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사제와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이자,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을 전하며 교회의 큰 어른으로 살아온 정진석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정리했다.



명동 토박이 효자 추기경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 추기경은 주교좌 명동대성당과 누구보다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명동 토박이이다. 정 추기경 스스로 “나는 혼인성사와 병자성사를 제외하고 세례ㆍ견진ㆍ성체ㆍ고해ㆍ성품성사를 명동대성당에서 받았다”고 할 만큼 명동대성당은 그의 영적ㆍ육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12월 그의 본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 출신의 아버지 정원모(갈리스토)씨와 어머니 이복순(루치아)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의 부모는 명동대성당에서 혼배를 하고, 서울 수표동에서 가구공장을 하던 추기경의 외가에 가정을 꾸렸다.

불행히도 정 추기경은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부친이 1931년 ‘조선 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돼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가족을 두고 만주로 떠났다. 부친은 1944년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재구속돼 경기도경에서 수사를 받고 광복을 맞아 석방된 후 월북했다. 그래서 정 추기경은 중1 때 생물학 시간에 수정(受精)을 배우기 전까지 “스스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던 독실한 신자였다. 이웃의 가난한 아기들이 젖동냥을 오면 주저 없이 젖을 물렸다. 그러나 돌림병을 옮길까 봐 외아들에게 줄 다른 쪽 젖은 물리지 않았다. 홀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으로 성장한 정 추기경은 소문난 ‘효자’다. 정 추기경은 로마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 선종할 때까지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정 추기경은 “수호성인인 루치아 성녀처럼 내가 죽으면 필요한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구 적출 수술을 지켜보았고, 당신의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와 모든 연령을 위해 미사를 봉헌할 만큼 효심이 깊었다.

정 추기경은 태어나 나흘 만에 유아 세례를 받고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란다. 그는 계성보통학생 시절 명동대성당 보좌이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 미사 복사를 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그는 새벽마다 홀로 골목길을 걸으며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목에 십자가를 걸치고 “나는 꼬마 주교님이다!”를 외치며 성당 복사를 서러 새벽을 깨웠다. 그는 단 하루도 복사에 빠지지 않아 노 신부에게 십자가를 상으로 받았다. 노기남 신부가 1942년 한국인 첫 주교로 수품될 때 복사를 섰던 까까머리 소년은 56년 후 같은 장소에서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이 됐고, 8년 후 추기경이 됐다.



하느님의 부르심


가장 부지런한 복사로, 일본 어린이들만 드나들던 어린이 도서관에 숨어 들어가 위인전에 빠진 꼬마 독서광으로 유년 시절을 보낸 정 추기경은 중학생 시절 독서회 회원들과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 “하느님은 없다”며 무신론에 빠져 한때 성당을 멀리했다. 그러던 중 1947년 명동대성당에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명쾌하게 설명한 윤형중 신부의 사순 특강을 듣고 통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극적 체험을 했다.

1950년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정 추기경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수한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서울 수복 전날 밤 골방에서 함께 숨어있던 육촌 동생 미카엘이 폭탄 파편에 맞아 바로 옆자리에 숨졌다. 1ㆍ4 후퇴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서 마산까지 걸어갈 때였다. 덕소 근처에서 얼어있는 한강을 건너는데, 정 추기경이 지나간 다음에 얼음이 깨져서 뒤에 오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추기경이 막 건너간 다음이다. 또 의성쯤 갔을 때는 추기경 바로 앞에 간 사람들이 지뢰를 밟아 죽었다. 낙동강 전투 때 뿌려놓았던 지뢰였다.

이렇게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정 추기경은 “하느님께서는 왜 나를 살리셨을까?”하는 물음에 빠졌다. 이 물음은 정 추기경이 사제 성소를 받는 큰 동기가 됐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성찰한 그는 ‘모든 이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제가 되자!’고 결심하고 어린 시절부터 희망해 왔던 발명가의 꿈을 접고 사제의 길을 택했다.



통찰력을 가진 사제


정 추기경은 서울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3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정 추기경은 사제 수품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때 감히 내가 거룩한 사제가 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사제품을 받기 위해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동안 한국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기던 일들이 마치 영화의 순간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때 많은 죽을 고비에서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하느님 뜻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인생은 덤으로 받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제 서품 미사 중 죄 많은 내가 어떻게 성스러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감정이 북받쳐 많이 울었습니다. 감격스럽고 또한 동시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울 중림동약현본당 보좌로 사제직의 첫발을 내디딘 정 추기경은 소신학교인 성신고 교사로 7년을 재직한 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해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과 동시에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주교로 임명됐다. 그가 39살 나이에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날이 바로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다.

청주교구장으로 28년간 재임한 후 그는 199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제12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이후 2006년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부터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정 추기경의 사목 통찰력은 주교 서품 당시 인사말에서 “이상과 현실을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조화시키고 실천해 나가겠다”고 밝혔을 때부터 드러났다.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 28년간 재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지역 복음화율 △신자 대비 본당 수 △신자 대비 사제 수 등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정 추기경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그래서 1998년부터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새 복음화 시대에 대비한 시노드를 개최했다. 정 추기경은 시노드 개최뿐 아니라 후속 작업을 무리 없이 사제단과 신자들과의 조화와 일치 속에서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아울러 △지역장 대리구제 △복음화 2020운동 △공동 사목 등을 한국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시행했다. 한반도 통일을 대비해 의정부교구를 과감하게 신설 분할하고, 미래 교회의 주인공인 청소년과 젊은이들과 인간 생명을 수호하는 일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결단성을 보여줬다.

이처럼 무성한 숲을 위해 차근차근 간벌하고,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어 새 숲을 가꾸는 조림꾼처럼 당장은 성과가 눈에 띄지 않지만, 미래에 풍성한 결실을 거둬들이는 사목 스타일이 정 추기경의 참모습이다.



학자이며 저술가

정 추기경은 학자답게 방대한 독서량으로 유명하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넓은 이해심의 바탕에는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한 학덕이 깔려있다. 초등학생 시절 새벽 미사 복사를 마치면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학교와 인근 소공동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은퇴 후 병석에 눕기 전에까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기도 시간까지 2시간여를 독서와 저술로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매일 책에만 할애한 새벽의 2시간이 저서 51권 역서 14권, 전집 등 총 65권의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정 추기경은 목자요 교회법 학자답게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지켜온 인물이다. 그는 무릇 사제란 “유한한 가치를 몽땅 버리고 구원의 품에 안겨 파릇파릇한 새싹을 싸늘한 수의로 휘감은 뜨거운 송장의 길을 스스로 택한 어리석은 자라야 한다”고 가르치며 스스로 세상에 어리석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길 원했다. 특히 서울대교구장 시절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란과 관련, 국민의 냉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며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탁월한 신심가

정 추기경은 너그럽고 겸손하며 후덕한 인격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리 바빠도 상대의 얘기를 다 들어주고 “또 물어볼 것 없어?”라고 말할 만큼 항상 온화하고 소탈한 목자다. 하지만 일 처리에 있어선 늘 적극적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실천적 통찰력으로 결단력 있게 추진해와 ‘정중동’(靜中動)의 표상으로 인정받아 왔다.

정 추기경은 사목 표어대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때를 가리지 않고 만나주는 어진 목자였다. 성당과 길거리에서 만난 신자들에게 일일이 축복해 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청주교구장 시절 기자들이 밤늦은 시간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가 교회와 사회 현안에 대해 질문해도 싫은 기색 한번 비치지 않고 응대해주기도 했다.

정 추기경의 겸손은 그의 신심에서 비롯된 삶의 태도였다. 정 추기경은 성체 신심과 순교 영성이 깊은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 추기경은 성체대회와 순교자 현양 행사를 열어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신비를 실천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해 왔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다 순교한 동정녀 마리아 고레티 성녀와 최양업 신부를 각별히 공경해온 정 추기경은 늘 신자들에게 이들을 소개하며 “육신의 절제와 자기 희생, 순교 정신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제를 사랑한 목자

정 추기경은 은퇴 후 혜화동 주교관에 머물면서 신학생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하느님의 질문을 매일매일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으니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여러분의 부족한 점도 당신 영광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든 절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또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그 최종 목적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곧 성경”이라며 늘 성경을 가까이할 것을 권고했다.

정 추기경은 첫 본당 임지로 떠나는 새 신부에게는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해 달라” “신자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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