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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 자제 세 명을 조선 교회 사제로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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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김대건·최양업 전](3)충청도 출신의 세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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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5 발행 [1610호]
▲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신앙공동체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교우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제준·최경환·최한지의 맏아들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사진은 1820년대에 형성된 은이 교우촌



조선 신학생 3명

최양업 신부 가족은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서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1827년에서 1830년 사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일구어 살던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해 얼마간 산다. 이후 최양업 신부는 홍주 다락골에서 서울로 이사했을 때처럼 더 나은 교리 공부와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부평에 정착한다. 이때가 1832년에서 1836년께이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 사학계에선 “최양업이 만 11세 되던 1832년경 과천 수리산 뒤뜸이에 거주하게 돼 이곳에서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추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 연구」 제14집, 24쪽, 1999년 참조) 하지만 학자들의 최근 연구 견해는 1838년에 최양업 신부 가족이 수리산으로 이주했다는 게 일반적이다. 그 근거는 최경환 성인의 둘째 아들 곧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으로 추정되는 최 베드로(최의정 야고보)가 “자신은 정해년(1827년)생으로 1886년 증언 당시 60세이며, 자기 나이 12세에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밝힌 증언록이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1회차, 최베드로 증언 참조) 이에 최양업 신부는 ‘부평 접푸리(전퍼리)’에서 살 때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는 게 최근 학계 동향이다.

김대건 신부는 앞서(1회) 밝힌 것처럼 용인 굴암 또는 양지 은이에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아울러 최방제는 경기도 남양에서 신학생 후보로 뽑혔다. 최방제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 자 편지에서 자신이 선발한 3명의 신학생 후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경기도 남양 출신이며 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 김(대건) 안드레아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

하지만 마카오의 조선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장 앙투완 뒤브와(Jean Antoine Dubois, 1766~1848)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방제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중국의 강천(도광제) 연초(1821년)에 조선 왕국 충청도의 작은 도시 홍주에서 태어났다”고 밝힌다. 조선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칼르리 신부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 홍주”라고 한 것을 보면, 최방제의 출생지가 경기도 남양이 아니라 ‘홍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역시 문초 과정에서 “홍주 최한지의 아들 방제”라고 밝히고 있다.(「일성록」 김대건 신부의 6번째 문초 기록 참조)

칼르리 신부는 최방제에 관해 “그의 가족은 양반이고 또 지낸 벼슬로 인해 유명했었으나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맹수들이 서식하는 높은 산들을 넘어 영원한 구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어린 하비에르는 나쁜 표양의 소문은커녕 나이가 들며 지혜가 자랐습니다. 이 순진한 영혼은 완전히 성령의 감도하심을 따라 미구에 기도와 덕행에 대해 완전한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하비에르를 조선의 성직자 양성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귀중한 존재로 모방 신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그를 그의 곁에 불렀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전교회지」 11호, 1838~1839. 359~362쪽 참조)

이러한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면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은 모두 충청도 출신으로 경기도에서 살다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음을 알 수 있다.






왜 경기도인가

3명의 신학생 후보는 왜 경기도에 거주했을까? 1801년 신유박해로 초기 신앙공동체는 거의 무너졌다. 박해를 피해 목숨을 보전한 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1830년대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새롭게 신자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시기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중심지가 된 대표적인 교우촌이 바로 과천 수리산, 고양 용머리(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경기 남부 내륙의 광주 구산, 용인 굴암(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양지, 이천, 죽산, 인천 함박이 등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 산골에 신자들이 이주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교회의 중심지인 서울과 교류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서울은 연고가 없어도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는 거처와 일자리를 마련하기 쉬웠기에 지방의 신자들이 서울로 많이 이주했다. 특히 부양자가 없어 생계가 막막한 여교우들이 서울로 올라와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비신자들 속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서울보다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방 산골로 이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들은 박해 중에 밀고되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숨어 삽니다. 그래서 헌신적인 2~3명의 중개로만 서로 연락할 뿐입니다.”(다블뤼 신부의 1840년대 말 편지 중에서)

“교우들이 사는 산골에서 판공을 할 때는 교우들에게는 어려움이 덜하고 선교사에게는 피로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교우들이 비신자들과 완전히 떨어져 있어서 도시에서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몹시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는 거의 자유롭게 있을 수 있습니다.”(베르뇌 주교가 앙리 드 라 부이으리 남작에게 보낸 1815년 9월 15일 자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수리산 교우촌은 선교사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 사목 방문을 할 때 우선적으로 방문하는 교우촌이었다. 모방 신부는 여러 번 수리산 교우촌를 방문해 성사를 집전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1838년 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지방 사목 방문에서 첫 번째로 수리산 교우촌을 방문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중남부 산골에 위치한 용인ㆍ안성ㆍ양지ㆍ이천 지역 교우촌은 1820년대 이전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던 신앙공동체이다.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 양지 ‘은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와 용인 ‘굴암’이다. 특히 은이에 교우촌을 이룬 시기는 1820년대 이전으로 올라간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약전」에 따르면 “충청 덕산 출신으로 은이 회장이었던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년께 출생)가 21세 때(1819년께) 신자와 결혼해 산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외진 곳이었는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한이형은 1838년 12월에서 1839년 1월 사이 은이를 방문한 앵베르 주교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됐다.

용인 굴암 역시 은이 못지 않은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치명일기」와 「박순집 증언록」에 따르면 1866년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1867년 귀국한 최인서(요한) 서울 애오개 회장이 1868년 4월 체포돼 7월에 강화도 진무영에서 순교했다. 최인서는 굴암 태생으로 7~8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최인서 가족은 1810~1820년대에 걸쳐 굴암에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음을 알려준다. 모방 신부는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서 “굴암에는 130~140명의 신자가 있으며 구교우와 신자, 예비신자가 비신자와 섞여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를 종합하면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신앙공동체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교우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제준, 최경환, 최한지의 맏아들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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