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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고향 떠나 서울로 상경한 최양업 일가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고향 떠나 서울로 상경한 최양업 일가

[신 김대건·최양업 전] (2)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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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발행 [1609호]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다래골, 다리골로도 불림)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오서산에 둘러싸여 형세가 마치 누각의 기둥 같아 ‘다락골’이라 불렀다. 박해자들의 근거지인 감영으로부터 걸어서 반나절 길에 있어 근황 파악에 쉽고, 앞은 틔어 있어 감시 또한 쉬우며, 주위가 험한 산이어서 피신하기 좋아 교우촌으로서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다.


다락골은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족보와 묘를 참조하면 적어도 160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에서 다락골로 이주해 ‘새터’를 이룬 때는 1791년 진산사건 이후이다.





경주 최씨 집성촌 다락골에 교우촌 일구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빈첸시오)이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우정 바실리오 이력서」, 최 신부의 넷째 제수 송아가타가 구술한 「송아가타 이력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최 신부 집안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증조부 최한일이다. 그는 동생 최한기와 함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정조 재위 11년 되던 해인 1787년 서울 본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해 외아들 인주를 둔 채 사망했다. 최 신부의 증조모인 경주 이씨는 1791년 박해가 일자 화를 피하려 12살 된 아들 인주를 앞세워 최씨 집성촌인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이라 불리던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 집안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후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했다. 최양업 신부는 최인주 할아버지가 1791년 박해 때 체포돼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된 후 다락골로 이주했다고 밝히고 있다.(최양업 신부의 8번째 서한 중에서)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농사 품팔이를 하고, 경주 이씨는 가을걷이 품앗이와 바느질 품을 팔아 생활했다.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최인주는 어머니 이씨 부인과 함께 다락골에서 700여m 떨어진 지금의 새터로 옮겨 주인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며 살림살이를 늘렸다. 차츰 이웃이 늘어 교우촌을 이루고 이름도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최인주는 이곳에서 이존창 집안의 딸인 경주 이씨와 혼인해 영설, 영겸, 영눌 3형제와 네 딸을 낳았다. 그중 막내 영눌이 최 신부의 아버지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최경환은 15살 되던 해에 새터에서 이성례(마리아, 복자)와 혼인했다.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 딸이다.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 간이 된다. 둘은 장남인 양업과 의정(야고보), 선정(안드레아), 우정(바실리오), 신정(델레신포로), 2살 때 옥사한 막내 스테파노 등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최양업도 이곳 다락골 새터에서 1821년 3월 1일 태어났다.



▲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의 탄생지인 청양 새터 집터.



새터에서 서울로 이주

최경환은 교리를 배우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새터를 떠나 25명이나 되는 형제 일가를 모두를 데리고 서울로 이주했다. 최경환의 둘째 아들 곧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 최의정(야고보)은 182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이사한 지 3년이 지나 신자임이 탄로 나 산속으로 피신했다”는 최양업 신부의 서한(1851년 10월 15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과 「기해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최 신부 일가가 청양 다락골 새터에서 서울로 이주한 때는 대략 1824년에서 1827년 사이였다. 최 신부가 1821년생이니 만 3~6세 때이다.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04쪽에서 “최경환과 형제들 가족은 1827년경 고향인 홍주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현 중구 회현동 인근)으로 이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낙동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에도 언급된 ‘난동’(蘭洞, 현 서울 회현동 2가)을 잘못 기록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1883년 3월부터 1901년 5월까지 105회차에 걸쳐 열렸던 조선대목구 시복 재판 기록)에는 ‘공덕리’ ‘벙거지골’에 최 신부 일가가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시복 재판에서 “최경환의 아들”이라고 밝힌 최 베드로는 “문밖에 위치한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살았다”고 했다. 최양업 신부 형제 중 ‘베드로’는 없다. 학자들은 이 증언자가 둘째 의정으로 세례명으로 ‘야고보’와 ‘베드로’ 모두를 사용했으리라 추정한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당신 신자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일례로 병인박해 순교자 이성국은 ‘베드로와 필립보’로, 김성화는 ‘요한 또는 야고보’로 불렸다. 아마 교우촌에서 세례받기 전에 성인들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사제에게 세례성사를 받을 때 또 다른 세례명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또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북경을 왕래하며 1836년 1월에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입국시켰던 김 프란치스코도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문밖에 큰 집 하나를 사 살다가 위험이 있어 집을 버리고 시골로 여러 곳에 이사했다”고 시복 재판에서 밝혀 최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해 줬다. 현석문(가롤로)의 대자로 부평에서 최경환과 3년간 함께 산 이 베드로는 “최 프란치스코가 서울 벙거지골(현 서울 종로3가 일대)에 살 때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없어졌다”고 했다.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우던 시기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조선 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우던 시기였다. 박해를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교우들은 연락망을 구축해 교회 조직을 추슬렀다.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 후 성사생활과 교리 교육을 위해 무엇보다 사제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했다. 최양업 일가는 조선 교회 재건의 중심지였던 서울 남대문과 서소문을 잇는 서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공덕리와 남문 밖 마포, 서강 일대, 경기 감영 앞 등 서울 서부 지역에 신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해일기」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을 통해 서울 신자들의 거주 지역 분포를 연구한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박사는 “당시 신자들은 도성 밖에 더 많이 거주했으며, 서부 지역 거주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중반 서울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체 신자의 3분의 2가 도성 밖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박해를 겪는 과정에서 도성 안보다는 밖에서의 전교 활동이 좀더 자유로웠던 상황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복 재판록과 19세기 전반기 서울 지역 신자 거주 지역 기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종합해 볼 때 최 베드로의 증언처럼 ‘도성 밖 공덕리’에 최양업 일가가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최경환 성인 주도해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아 공덕리와 벙거지골, 난동을 옮겨 다녔을 수도 있겠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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