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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아픔은 그대로… “다시 그 상황 와도 기꺼이 맞설거에요”

5월의 아픔은 그대로… “다시 그 상황 와도 기꺼이 맞설거에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 진실 알리려고 거리 방송 나섰던 차명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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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7 발행 [1564호]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시내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차명숙(가타리나, 60, 안동교구 송현동본당)씨가 40년 전 광주 시내를 누비면서 거리 방송을 통해 외쳤던 말이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다. 하지만 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고, 지금도 많은 이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아 날씨가 유난히 화창했던 7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차명숙씨를 만났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지우고 싶은 5월 기억


연두색 스카프에 꽃무늬 브로치를 한 차명숙씨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5·18의 아픈 기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을 꺼내기 시작하자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차씨는 “당시 5월의 광주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기억하는 순간 죽은 사람부터 그 모든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트라우마에 갇혀 산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광주에 가면 옛 전남도청 자리나 금남로에는 머무르기가 힘들다”며 “최근 인터뷰를 위해 광주에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감정 조절이 안 됐다”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5ㆍ18의 아픈 기억은 지독하리만큼 차씨를 떠날 줄 모른다. 사진만 보고도 당시의 상황이 어제 일처럼 떠오를 정도다.


▲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차명숙(차에 탄 사람들 중 왼쪽에서 세 번째)씨가 시민들과 거리 방송을 하고 있다.



가지 않은 길, 가야만 했던 길

1980년 5월 19일 오후 차씨는 사람들과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계엄이 선포되고 군인이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총칼을 겨눴다. 직접 실상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인과 경찰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어서 언론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과 스피커와 확성기를 구해 21일까지 거리방송을 했다. 그렇게 거리방송을 하고 23일 기독병원에서 주검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돌보다 기관원들에게 붙잡혔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에 북한 간첩이 들어와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이 일어났다’는 언론 보도를 내보냈다.

차씨는 보안사령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보안대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25일 상무대, 6월 4일 광산경찰서, 15년형을 구형받고 9월 16일 광주교도소에 가서도 고문은 계속됐다. 광주교도소에서는 불온한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려 하기도 했다.

차씨는 “형이 확정되고 나서 수인번호 113이 적인 죄수복을 입고 호송차를 타는데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며 “잘못한 일도 없는데 죄수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차씨는 10월 29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 차명숙씨와 두 아들, 함세웅 신부(오른쪽)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차명숙씨 제공



포기할 수 없는 신앙


신앙은 힘든 교도소 생활에 한 줄기 빛이었다. 예비신자였던 차씨는 성경을 읽으며 교도소 생활을 견뎌냈다. 그러던 중 1981년 12월 형집행 정지가 되면서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차씨는 풀려난 후 서울로 올라왔다. 광주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 그는 이미 간첩이었다. 어딜 가나 경찰이 따라 붙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알고 지내던 한 신자의 소개로 함세웅 신부를 만났다. 하지만 경찰들은 서울에서도 차씨를 따라다녔다. 함 신부와 차씨를 떼어놓기 위해 이간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 신부는 물심양면으로 차씨를 도왔다. 함 신부는 “1980년 5월 우리는 다른 지역에 있었지만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고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은 같다”고 차씨를 위로했다.

수도자들과 신자들도 차씨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 신자의 도움으로 1982년 12월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서울 종로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985년 서울 신림동성당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1986년 안동 태화동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한 뒤 안동에 정착했다.

차씨는 “광주에서 살았으면 정상적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라며 “하느님이 저를 다른 방법으로 쓰시려고 안동에 살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차씨는 2001년 5ㆍ18 유공자가 됐다. 그때부터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당시 정부가 당사자가 살아있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기록을 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은 내용으로도 기록해 왜곡된 게 많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재심청구를 통해 2013년 모든 자신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힘을 줬지만, 무엇보다 힘이 됐던 건 남편과 두 아들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걸어갈 길

차씨에게 ‘거리방송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지, 다시 그 상황이 돼도 마이크를 잡을 건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후회는 없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거리방송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기꺼이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언제쯤 5ㆍ18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돌아온 차씨의 대답에 기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차씨가 말한 그때는 자신이 ‘예쁜 치매’에 걸리는 때였다. 그는 “제가 예쁜 치매에 걸려 좋은 기억만 하게 되면 5ㆍ18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바람은 저뿐만 아니라 5ㆍ18을 겪은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5ㆍ18의 아픈 기억만 떠올리게 될 수도 있을까 봐 두렵다”는 말도 했다.

차씨는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앞장서려 한다. 그는 “사람들이 제대로 말하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입과 눈, 귀를 가지는 일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다”며 “나아가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5·18을 왜곡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시간을 갖고 계속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차명숙씨는 현재 대구·경북 5·18동지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리고 5·18 강연회와 간담회 등을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2019년 6월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인권유린을 고발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받아 제3회 길원옥 여성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해마다 5월이 되면 5·18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올해는 17일에 안동에서 코로나19 희생자와 5·18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안동지부장을 맡아 연탄 나눔을 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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