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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화해의 훈풍, 얼어붙었던 남북 교회 관계 녹이다

평화와 화해의 훈풍, 얼어붙었던 남북 교회 관계 녹이다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6) 장충성당과 교황 알현한 북한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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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0 발행 [1563호]
▲ 지학순 주교와 누이동생 용화씨.


한국 주교회의는 1965년 6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제정하고 북한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75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됐고, 1981년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이동호 아빠스가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에 임명됐다. 하지만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냉전과 반공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장 이동호 아빠스는 198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먼저 가톨릭 신자들은 민족 분단을 화해하지 못하고 평화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해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며 “그동안 우리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덮어쓰고 똑같이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죄 없는 북한의 형제들을 얼마나 증오했는가”라고 지적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김일성 주석


“제 책임이 커요. 제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사는 김일성 주석은 저의 어린양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

북한 문제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울 때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평양교구장 서리로 북녘의 신자들을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다. 어딘가에 숨어서 반세기 넘도록 신앙을 지켜 온 신자들을 찾고 싶다. 단 몇 명이라도 좋다. 그들이 나타나면 꼭 껴안고 어깨를 두드려 주리라.”

북녘의 신자를 찾고 싶었던 김 추기경의 바람은 몇 년 후에 이루어진다. 북한 당국은 1987년 평양에서 열린 비동맹각료회의에 바티칸 인사를 초대했고, 당시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가 바티칸 대표단 일원으로 평양 땅을 밟았다. 장 신부는 “평양에서 신자라고 밝히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지만, 그들을 모두 신자라고 믿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과 ○○○은 틀림없는 신자 같다”고 보고했다.

북한 땅을 밟은 사제는 장익 신부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로부터 북한 선교를 위한 해외 활동 위원으로 임명받은 고종옥(캐나다 몬트리올대교구) 신부가 1984년 한국 교회에서 파견한 사제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해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물꼬를 텄다. 다음 해 9월에는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찾아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한국 순교 성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지 주교는 35년 만에 동생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분단의 세월이 긴 만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판이했다. 누이동생이 쏟아내는 말에 지 주교는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돌았구만요. 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 1988년 3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에 북한 신자로는 최초로 이진철(왼쪽)·홍도숙씨가 교황청을 방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안수를 받고 있다. 뒤에 춘천교구장 주교가 된 장익 신부가 보인다.



한반도에 부는 남북 화해의 바람

1988년을 기점으로 남측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였고, 대학가는 남북 청년 학생 회담 성사와 단독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올림픽을 민족 화해와 대단결의 기운을 드높이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같은 해 5월 15일 서울대학생 조성만(요셉)씨가 주교좌 명동대성당 문화관 옥상에 올라 △양심수 석방 △분단 체제를 강요하는 미군 철수 △남북한 공동 올림픽을 개최해 조국 통일을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씨의 죽음으로 각계각층에서 통일 운동은 더 세차게 번졌고, 정의구현사제단도 그해 7월 4일 성명을 내고 정부의 적극적인 통일 대책을 촉구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7월 7일에 6개 항에 걸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 선언, 즉 7ㆍ7선언을 내놓았다. 골자는 북한을 적이 아닌 동반자적 관계로 볼 것이며 동포 간 교류를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과 통일에 대한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이뤄진 셈이다.(「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 3」 참조)

북한에서도 통일에 대한 기류와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북한에는 가톨릭 신자 수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북한 당국은 가톨릭교회가 국제 사회에서 갖고있는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은 실제로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는 1989년 북한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외면상 ‘화해 무드’가 필요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문규현 신부는 저서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 3」에서 “남한의 종교인들이 사회 정의와 반독재 민주화의 대열에 대담하게 나서자, 그들은 남한 종교가 단지 가진 자와 외세의 편에 선 아편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어쨌든 북한은 바티칸의 초대로 북한 신자를 교황청에 보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게 했다. 1988년 3월 30일 이진철(모이세), 홍도숙(데레사)씨가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에 참여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발 씻김과 안수를 받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 1988년 완공된 평양 장충성당은 건평 1650㎡로 200여 개의 회중석을 갖추고 있다.


▲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북녘 신자들.



침묵의 교회에 나타난 ‘조선천주교인협회’

같은 해 6월 30일, 북한 평양방송에서 충격적인 내용이 흘러나온다. “천주교인들의 자유와 권익을 보호하며, 다른 나라 천주교인 및 단체들과도 친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성한다.” 방송에서는 “지난날 천주교인들의 단체가 없었던 관계로 천주교인 대변과 교회 발전을 이룩하는 데 일정한 제한이 있었던 탓에 협의회를 발족한다”고 단체의 설립 배경을 밝혔다. 놀라운 변화였다.

1988년 평양 장충성당이 완공됐다. 주일에는 100여 명의 신자가 모여 공소 예절을 했다. 그리고 10월 30일에는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장익 신부와 정의철 신부가 장충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1989년 2월 북한선교위원회 해외 임원으로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하던 박창득 신부 등이 교포 신자들과 방북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북한 신자들과의 첫 공식 만남을 가졌다. 같은 해 6월 문규현 신부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남북 동시 통일 염원 미사 봉헌을 위해 평양 장충성당을 방문했고, 8월에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수산나)의 귀환을 돕기 위해 재차 방북했다. 이로인해 북한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고조됐다.

북에서 종교적 해빙 조짐이 보이자 성 요한 바오로 교황은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에 앞서 방북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무산됐다. 통일 문제와 관련한 주교단의 공동 사목교서도 결국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북한 조선천주교인협회와 평양 장충성당이 남한 교회나 교황청과의 교계적인 연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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