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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박해 일삼은 공산주의… 미움 거두고 화해의 손 내민 교회

잔혹한 박해 일삼은 공산주의… 미움 거두고 화해의 손 내민 교회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15) 반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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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발행 [1562호]
▲ 「사목헌장」은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무신론자들이 왜 반교회적 태도를 취하는지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계 각국 시노드 교부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해 논의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반공주의는 한국 교회만의 일은 아니었다. 세계 교회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유신론 대 무신론, 정신주의 대 물질주의, 창조론 대 진화론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 구조를 통해 공산주의를 반종교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반공주의 태도는 비오 12세 교황이 사도좌에 오르면서 더욱 강화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여러 회칙을 통해 공산주의의 위험을 경계했고, 1949년 7월에는 공산주의자를 파문하는 칙령을 내렸다. 사제품을 받을 때 반공산주의 선서를 하게 한 당시 교황청의 분위기에서 한국 교회에 반공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란 반공주의


한국전쟁은 한국 교회가 겪은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교회는 한국전쟁을 ‘십자군전쟁’이라 정당화했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발 더 나아가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신자들에게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는 논조를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시류 속에 북한 주민들은 동족이 아닌 무찔러야 할 원수로 여기기에 이른다.

특히 전쟁의 참상을 겪은 신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에 저지른 박해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이 모든 지방(대구대목구 내 교전 지역)에서 하나도 예외 없이 의복과 성물, 그 외에 남았던 물건은 전부 약탈당하였고, 성상과 제대에 대해 특히 능욕하는 행동으로써 성상은 목을 끊고 혹은 사격하여 파괴하고 제대의 감실 안에 사격의 표식을 만들어 총으로 사격한 표적이 확실히 남아 있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대전에서는 성당과 감옥에서 많은 신자가 살해되었으며, 제의에서 찢어낸 천 조각으로 사형자의 눈을 가리기도 하였다. 강계에서는 감실에서 성체를 끄집어내서는 조롱하는 몸짓과 함께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들은 이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자세히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신부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성체를 짓밟았다.”(「기억의 돋보기-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중)

신앙을 모독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가 쌓여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교회 전반에 깊게 뿌리내린 반공주의는 교회의 사회 개혁 의지를 후퇴시키는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1953년 한국 주교단 공동 교서는 전쟁 직전에 발표된 공동 교서보다 사회 참여에 대한 촉구가 생략됐고, 제도 개혁 의지도 약화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애국을 강조했다.

한국 주교단은 1957년 발표한 공동 교서에서 “가톨릭 신자는 반공 투사”라고 재차 천명했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물이면서 동시에 불이 될 수 없듯이 가톨릭과 공산주의와는 워낙 불공대천의 원수다.”(경향잡지 1957년 10월호)

이러한 교회의 반공주의는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의 통치마저 묵인하도록 만들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 교회 주교단. 가운데가 성 요한 23세 교황이며 그 왼쪽이 노기남 대주교다.



반공주의를 토대로 집권한 군사 정권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도한 5ㆍ16 군사정변이 미 정부의 신속한 지지를 받았다. 교회 역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린 군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군부 역시 군 정권의 국제 승인을 얻기 위해 교회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주한 교황 사절 하비에르 주피 대주교는 군사정변을 이끈 세력이 반공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점에 특별한 호감을 표현하고 미국에 앞서 그들을 인정했다. 군정이 내건 6개 항의 혁명 공약 중에는 “쿠데타의 목적을 확고한 반공 태세를 갖추는 데 두고 있다”는 항목이 있었다. 교회의 이런 태도는 군사 정권에서 한국 교회가 배격되거나 탄압받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 조처이기도 했다.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 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 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 또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 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가톨릭시보 1961년 5월 28일자)

이렇듯 남북 분단이 굳어지고 반공 사상이 위세를 떨쳤지만, 교회 내에서 남북 교류나 평화적 통일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교회는 한국전쟁 후 논의된 이산가족 사이의 서신 교환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서신 교환에 앞서 피랍자 송환을 요구했다.

“적십자 국제본부 주노씨의 내한을 계기로 소위 ‘실향사인’과 그 가족 사이의 서신 교환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천주의 적과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 인위적인 법 조문에 앞서 있는 인간의 지성과 도의를 강력히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피납치 인사의 송환’을 먼저 주장할 것이다.”(가톨릭시보 1960년 9월 4일자)

한국 교회는 기본적으로 북측 체제 인정이나 남북 대화, 혹은 민족 내부 간 자주적 교류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전쟁을 겪으며 평화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지 못했다. 민족의 재일치와 평화는 북한 공산 세력을 물리적으로 분쇄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이끈 박정희 육군 소장과 군인들.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을 통제했다.



척결의 대상에서 민족 화해의 대상으로

보편 교회에 반공주의는 1965년 12월 8일 폐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변화의 기류를 보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 헌장」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무신론자들, 교회의 반대자들이 왜 반교회적 태도를 보이는지 경청해야 하며, 대화 또한 나누어야 한다며 기존과 변화한 입장을 보였다. 심지어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고 또 얻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바이다”(「사목 헌장」 44항)라고 했다.

한국 교회는 1972년 ‘7ㆍ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이후 남북 대화가 이뤄지면서 그제야 교회 안에서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회 역시 전쟁보다는 평화를 강조하는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북한 교회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싹트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기념사업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설치했다. 북한선교부는 1985년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해체에 따라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돼 그해 10월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북한선교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전국 위원회로 승격했다. 주교회의는 1999년 가을 총회에서 다시 ‘민족화해위원회’로 기구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 운동뿐 아니라 인도주의적 대북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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