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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원조·구호 활동으로 전쟁의 시련 이겨낸 한국 교회

해외 원조·구호 활동으로 전쟁의 시련 이겨낸 한국 교회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4) 다시 일어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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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6 발행 [1561호]
▲ CRS가 설립한 광주대교구 북동본당 무료급식소 앞에 바쁜 부모를 대신해 식량을 타러 온 아이들이 줄 지어 서 있다. 가톨릭구제회 제공



전쟁은 상처만 남겼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토는 잿더미가 됐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이산가족만 514만 명이 생겨났다. 전쟁미망인 20만 명, 고아도 10만 명이 넘었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는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돌볼 여력조차 없었다.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에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지원과 연대를 호소했다.


▲ 천주교 서울 구제위원회 위원들이 1962년 2월 영세 난민 구호용품을 서울시에 전달 후 기념 촬영 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서 네번째가 노기남 주교이다. 출처=경향신문


재건을 위해 발로 뛴 교회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 시설을 복구할 능력이 없었다.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복구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도 마다치 않고 찾아다녔다.

노 주교는 외국의 여러 주교에게 원조를 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들 중에는 미국 디트로이트대교구 무니(Mooney) 추기경도 있었다. “당신이 ‘예스 바오로’라고 부르던 노 바오로입니다. 지금은 서울교구의 주교가 되어 이 편지를 씁니다.” 노 주교와 무니 추기경의 인연은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해 명동성당에 머물던 당시 무니 교황대사는 사제품을 받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노 신부에게 이름을 물었다. 노 신부는 “노 바오로입니다”라고 답했고, 무니 교황대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예스 바오로”라고 답했다. 노 신부가 다시 “아닙니다. 노 바오로입니다”라고 답하길 몇 번, 그제야 무니 교황대사는 “당신이 바오로가 아니면 누가 바오로입니까?”라며 웃으며 말했다. 유쾌한 성격의 무니 교황대사가 노 신부의 성인 ‘노’와 발음이 같은 영어 ‘NO’를 사용해 농담을 건넨 것이다.

노 주교의 편지를 받은 무니 추기경은 미화 1000달러를 보내줬고 해마다 성탄 카드와 함께 성금을 보냈다. 노 주교가 1954년 무니 추기경을 만나러 디트로이트를 방문했을 때에도 “예스 주교”라고 반기며 서로 얼싸안고 감격적 재회를 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오른 노 주교는 주머니에 3000달러 수표가 든 봉투와 쪽지를 뒤늦게 발견했다. 쪽지에는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 1950년대 초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수녀원의 수도자들이 미군과 함께 김장거리를 준비해 가는 모습. 출처=「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888-1988」



한국의 재건 도운 보편 교회의 형제들

1953년 휴전 이후부터 1960년에 우리나라가 받은 해외 원조는 약 17억 4500만 달러에 달했다. 특히 미국 교회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막대한 양의 구호물품을 원조했다. 미국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s, CRS) 활동은 두드러졌다. CRS는 당시 74개 해외 단체 구호물자 중 72%에 달하는 12만 9447톤 현물을 지원했다. 미국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교회는 파괴된 성당과 교회시설을 복구하고, 보육원과 양로원, 모자원, 학교 등을 건립했다.

오스트리아 교회도 한국 재건에 힘을 보탰다. 1958년 독일 유학 중이던 당시 김수환 신부가 오스트리아부인회 모임에 참석해 도움을 호소한 것이 주효했다. 후원은 평범한 신자들의 극기와 사랑나눔을 통해 이뤄졌다. 오스트리아 교회 신자들은 ‘한국의 날’을 정해 한 끼를 금식해서 기금을 모았다. 가족 단식일 운동, 사순절 한 끼 금식 등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며 1958년 미화 8만 달러, 1959년 16만 7000달러, 1960년 24만 달러 등 1970년대까지 한국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독일 주교회의 국제개발원조기구 미제레오르(Misereor)도 1960년대 이후 한국 지원을 본격화했다. 전후 복구시기가 아닌 경제개발 사업시기에 큰 힘을 보태며 한국을 도왔다.

▲ 예수성심시녀회는 1958년 포항 형산강 부근에 나환자를 위한 베타니아 마을을 만들고 전국 곳곳으로 이동진료를 다니며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출처=예수성심시녀회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선 교회

명동성당을 비롯한 각 지역 성당들은 구호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구호 활동은 구호품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 ‘밀가루 신자’를 낳는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한국 교회의 교세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진료소와 병원, 보육원 등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 활동 역시 이 시기 교세 성장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구체적 수치로 드러난다. 휴전 직후 남한 교회는 매우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다. 1953년 남한의 신자 수는 17만 명 정도였다. 휴전 이후 신자 수는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해 1962년에는 53만여 명을 기록했다.

본당과 사제 역시 많이 증가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142개 본당, 사제 251명(한국인 190, 외국인 61)에 불과했지만 8년 뒤 1962년에는 본당 275개, 사제 546명(한국인 296, 외국인 250)에 이르는 폭발적 성장세를 보였다.

신자 증가세에 맞춰 성당 재건 공사도 속도를 냈다. 신자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축 기금을 낼 형편이 못됐지만, 벽돌을 찍고 목재를 나르는 등 노동력을 제공하며 정성을 보탰다. 사제들은 미군 부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받은 미사 예물을 성전 건립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한국 교회는 교회 재건과 함께 새 대목구 설립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지목구였던 춘천이 1955년에 대목구로 승격했고, 1957년에는 광주ㆍ전주ㆍ부산대목구가, 1958년에는 대전대목구가 설정됐다. 1958년 청주대목구와 1961년 인천대목구가 설정돼 메리놀외방선교회가 두 대목구를 관장했다.



한국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수도회

수도회는 1950년대 한국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북녘에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큰 피해를 본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했고, 작은형제회도 전쟁으로 파괴된 수도원을 복원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에는 예수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가톨릭 고등교육기관인 서강대학교를 개교했다. 이 밖에도 몇몇 남자 수도회들이 창설되거나 한국에 진출했다.

죽음의 행진 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도 제자리를 잡아갔고, 함흥과 연길교구에서 선교하던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도 남한 사회에 정착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평양에서 서울로 정착했고,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성가소비녀회, 예수성심시녀회 등 본토인 수녀회도 창설됐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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