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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촌 찾아가 환자 치료하고, 전쟁고아의 부모 되어준 수도자들

빈촌 찾아가 환자 치료하고, 전쟁고아의 부모 되어준 수도자들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0)가톨릭교회와 사회복지 ② 수도회의 구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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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 발행 [1557호]
▲ 메리놀병원 진료소에서 부상당한 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메리놀병원은 매일 몰려드는 환자를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출처=메리놀병원 홈페이지



한국에 진출했던 수도회는 전쟁 기간 수도자들의 큰 희생에도 흔들리지 않고 피란민을 돌보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살아남은 수도자에게 닥친 상황은 피란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살 집을 잃었고, 굶주렸고, 부상당했다. 수도자들도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청소, 빨래 등을 하며 돈을 벌었고, 물건을 만들어 거리에서 팔았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고아에겐 부모가 돼 줬고, 배고픈 이들에겐 먹을 것을 나눠줬으며, 아픈 이들을 치료해 줬다. 또 사람들에게 교리와 기도를 가르치며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데 헌신했다.



부상병과 환자 치료한 의료 사도직

병원은 물론 거리에는 부상병들과 환자들로 넘쳐났다. 피란 행렬에 때때로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아비규환과도 같은 상황은 무시로 찾아왔다. 수도자들의 의료 사도직 활동은 빛을 발했다. 의사와 간호사, 약사 자격증을 가진 수도자들은 밤낮없이 일하며 부상당한 군인들과 주민들을 돌봤다.

서울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는 전쟁 중에 의사가 납북돼 잠시 문을 닫았다. 1951년 10월 홍순자(아드리아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수녀가 부임해 내과와 소아과 진료를 재개했다. 홍 수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6회 졸업생이었다. 수녀 의사가 병원 문을 다시 열었다는 소식에 병원은 매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게다가 ‘의술이 용하다’고 소문이 나 서울은 물론 경기도 양주, 고양에서 오는 환자들도 생겼다. 수녀들이 왔다고 싫어하던 동네 점집 무당들도 점을 보러 온 환자들에게 성모병원에 가야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일러줄 정도였다. 수도자들은 병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왕진 가방을 들고 직접 환자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동이 트면 수녀들은 가방을 가지고 빈촌(貧村)으로 환자를 찾아 나섰다. 어느 동네든 수녀들이 나타나면 동민들은 수녀들을 환영하였다. 아픈 자에게는 치료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이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걸어서 불쌍한 자에게 구호 받은 식량을 나누어 주고 치료와 선교를 쉴새 없이 하다 보면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수녀들은 지치지 않고 수녀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다녔다.”(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바오로 뜰 안의 애가 85년」 중에서)

메리놀수녀회가 부산에 문을 연 메리놀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51년 3월 다시 개원한 메리놀병원 주변에는 매일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몰려드는 환자들을 돌보다 미처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한 한 수녀는 과로로 쓰려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랑은 계속됐다. 메리놀병원 수녀들과 의료진은 평일 중 하루는 오전 진료만 하고, 오후에는 고아원과 빈민가를 찾아갔다. 병원에 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거나 아픈 이들을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어서다. 당연히 모든 진료비는 무료였다. 병원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주일학교를 열고, 환자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교리반을 운영했다. 당시 병원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들도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병원 주변 언덕과 길가 평지 어디에서나 작은 공간이 있으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 1950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첫영성체를 한 부산 중앙본당 신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들이 눈에 띈다. 수도자들은 전쟁 중에도 쉴 틈 없이 전교에 주력했고, 피란민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출처=「은혜의 60년」,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자들이 1950년 12월 부산 영도에 개설한 세탁소. 빨래터에서 미군 부대 빨래를 하며 피란민들을 도왔다. 출처=「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50년사」



한국 사회에 아동복지 사업 전파

가톨릭교회는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아동복지 사업을 전파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4년 메스트르(1808~1857,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설립한 영해회, 1888년 블랑(1844~1890, 파리외방전교회,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가 설립한 천주교 고아원은 한국 사회 아동양육시설의 효시(嚆矢)로 불린다. 그렇기에 전쟁 시기 아이를 돌보는 일은 수도회의 주요 사도직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 시기 부모를 잃거나, 가족과 헤어지거나, 생활고에 버려진 아이들이 크게 늘었다. 거리에서 구걸하고 소매치기와 구두닦이 등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아이들은 적게는 6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집계됐다.

수도자들은 외국 가톨릭교회의 원조를 받아 고아원, 보육원과 같은 아동 복지 시설을 건립했다. 또 교구나 본당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먹이고 가르쳤다. 시설에 자리가 없어 보낼 곳이 없는 아이들은 수녀원으로 데려와 함께 살기도 했다. 때때로 시설에 포탄이 떨어져 아이들이 수십 명씩 죽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수도자들은 1ㆍ4 후퇴 때 서울에 있던 고아원 아이들을 안양으로 피신시켰는데 1951년 1월 유엔군의 오폭으로 아이들 50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 고아원에선 보모 3명과 여자 아기 3명이 폭격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수녀들은 열 살 이상 된 아이들 70여 명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라 대구로 피신했다.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글을 익히고, 기도문을 외우고, 규율을 배웠다.

이처럼 수녀원을 중심으로 한 고아 구제 사업은 국가에 큰 힘이 됐다. 정부가 유엔 원조 기구 협력으로 설립한 어린이 구제 기관만으로는 넘쳐나는 고아를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터였다.

이 밖에도 수도자들은 피란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일자리를 만들고,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평양에서 피란 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자들은 1950년 12월 부산 영도에 미군 부대 빨래를 하는 세탁소를 개설했다. 전쟁 이재민을 위한 구제 사업의 하나였다. 수녀들은 피란민 부녀들과 함께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수건과 이부자리 등을 빨래터에서 빨았다. 또 부산에선 재봉틀을 여러 대 구해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위해 양재소(洋裁所)를 열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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