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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우리 선조는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우리 선조는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

우리 선조는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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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 발행 [1508호]

기해박해(己亥迫害)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대박해예요.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라고 해서 ‘기해박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천주교 신자 100여 명이 서양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죠.
 

그런데 사실 기해박해는 ‘신앙’을 빌미로 한 정치 권력 싸움의 성격이 컸다고 해요. 혼란한 시기에 삶의 안정을 원하던 일부 백성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에 기대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정치 세력은 이마저도 권력을 얻기 위해 이용했지요. 기해박해는 다른 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이 더 넓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지요. 그럼 180년 전 기해박해를 쉽게 알아볼까요.


조선 천주교회 상황은

신유년(1801)에 일어난 큰 박해 이후 30여 년간 조선 천주교회는 성직자 없는 교회로 지냈어요. 그 기간 천주교에 대해 조정의 박해는 잠잠했죠. 물론 조선 천주교회는 여전히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나름대로 성장을 계속했어요. 체포와 고문과 사형의 공포 속에서도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운동을 지속하기도 했죠. 정하상(바오로)ㆍ유진길(아우구스티노)ㆍ남이관(세바스티아노) 등은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청하는 서신을 북경과 남경, 교황청에 보내기도 했어요.


 공식적 박해의 시작 ‘사학토치령’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을 말해요. 1839년 4월 18일 반포된 사학토치령에는 “천주교인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군주 제도를 부정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 무리이니 좌우 포도청에 명령해 조사를 강화하고, 형조판서는 체포 신자들이 뉘우치지 않으면 처형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어요.

 

전국에 불어닥친 박해의 바람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었지만, 그 대상 지역은 더 넓었어요. 박해가 있기 전부터 신자들이 이미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 등 지역에 널리 확산해 있었기 때문이에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도 1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됐고, 강원도에서도 많은 신자가 체포됐어요.


형제들을 분열시킨 ‘오가작통법’
 

집집이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서로 도망가는 것을 감시하는 법이에요. 이 ‘오가작통법’ 때문에 신자들은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투옥된 신자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어요.


순교의 화관을 쓴 이들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는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 수는 60명에 이르러요.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돼 있어요. 당시 상황에서 기록에 빠진 신자들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 희생된 신자 수는 훨씬 많았을 거라고 해요. 이처럼 많은 순교자 가운데 선교사 3명, 남자 24명, 여자 43명이 성인품에 올랐어요. 이들을 기해박해 70위 성인이라고 한답니다.
 
군문효수형으로 백성들에게 경고하다


 

군문효수형은 조선시대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 중 더욱 큰 죄를 지었다고 판단된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달던 형벌이에요. 백성들이 죄인을 보고 겁을 먹도록 시행됐지요. 이 군문효수형은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어요. 당시 프랑스 선교사였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군문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상재상서, 박해의 부당성을 알리다
 

정하상이 붙잡힐 것을 미리 알고 쓴 천주교 변론서예요. 이후 이 상서는 당시 재상이었던 이지연에게 전해졌지요. 상재상서는 총 3644자로 지어진 짧은 글이지만, 천주교 교리뿐 아니라 유학 사상과 맹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박해의 부당성을 설명한 글이지요.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도 명료히 밝히고 있어요. 정하상은 “천주교 신앙은 지극히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며 천주의 존재와 속성, 인간의 본분과 십계명 등을 설명했지요. 무엇보다 ‘무부무군’을 이유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십계명을 들어 역으로 비판했답니다.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의 성장을 이끈 성직자들이에요. 세 성직자는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했지요. 기해박해로 인해 평신도 지도자였던 정하상ㆍ유진길ㆍ조신철(가롤로) 성인 등이 순교합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나타나기까지 다시 목자 없는 교회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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