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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순교 150주년-역사신문] 천주교인 '패륜적 흉악범, 국가 전복자' 오명 쓰게 돼

[병인순교 150주년-역사신문] 천주교인 '패륜적 흉악범, 국가 전복자' 오명 쓰게 돼

남연군 묘 파헤친 덕산 사건 자행한 페롱 신부,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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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6 발행 [1388호]
남연군 묘 파헤친 덕산 사건 자행한 페롱 신부, 그는 누구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덕산 사건으로 잠잠하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전국에서 재점화됐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을 계획하고 자행한 결정적 인물인 페롱 신부와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페롱 신부는
 

스타니슬라오 페롱 신부는 1827년 2월 프랑스 동프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즈 소ㆍ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50년 12월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플레르와 아르장탕에서 사목하다 1854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57년 3월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1861년부터는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맡아 사목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사제 7명이 순교한 후 조선 선교지 장상이 됐다. 그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공사와 극동 함대에 박해 사실을 알려 도움을 청하기 위해 1866년 7월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보냈고, 칼레 신부와 함께 자신도 10월 조선을 떠나 중국 체푸로 피신했다. 이후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던 그는 1868년 5월 오페르트 일행과 동조해 남연군 묘를 파헤치는 덕산 사건을 일으켰다.
 

 

위정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
 

조선의 위정자들은 덕산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인식했다. 먼저 박해의 정당성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덕산 사건을 병인양요의 연장선 위에서 파악해 천주교인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를 전복하려는 자들이라고 확신했다.
 

위정자들은 천주교는 사악한 가르침으로 조선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유교적 윤리 덕목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근절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임금의 할아버지 무덤마저 파헤쳤다고 하니 과연 천주교도들은 패륜의 극치에 이른 흉악한 무리임을 판명됐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위정자들은 조선의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조정을 뒤엎으려는 흉계를 지닌 자들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심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리델 신부가 길 안내를 한 것이나, 덕산 사건에 조선 신자들이 연루된 것을 보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위정자들은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되면서 시작된 병인박해, 7월에 있었던 제네럴 셔먼호 사건, 9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2차례에 걸쳐서 진행됐던 병인양요, 2년 뒤인 1868년 4월 미 군함 셰난도어 호의 내한, 그리고 1개월 뒤에 터진 덕산 사건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다.


 

왜 사건을 공모했나
 

페롱 신부는 병인양요와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는 조선 천주교회의 회생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중국 조정의 중재를 통해 박해를 종식시키고 교우들과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봤다. 하지만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한 페롱 신부는 평화적인 방법이라는 미명 아래에 조선 위정자 조상의 유골 탈취라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감행했다.
 

페롱 신부는 이 일을 1867년 5월 이전부터 계획한 것으로 파악했다. 자신의 이 계획에 대해 처음으로 내비친 것은 이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1867년 5월 15일 자 편지에서다. 그는 이 편지에서 “저는 꽤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미친 짓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리길재 기자




동료 선교사들과 주중 프랑스 공사의 페롱 신부에 대한 평가
 

주중 프랑스 랄르망 공사는 1868년 6월 22일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덕산 사건에 대해 “해적질이며 추후 사법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르모니에 신부는 “상해에 있는 신부들 모두가 놀라고 괴로워했다”고 답장했다.
 

리델 신부는 덕산 사건이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고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은 유럽인들과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집주인, 복사, 회장,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 교우들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1868년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대원군이 천주교를 증오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도굴 사건 당시 페롱 신부는 상해의 조선인 교우들이 가담하기를 원치 않자 강제로 그들을 배에 태웠고 하선할 때도 권총 소지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개머리판으로 교우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여자 교우들은 순교의 행복도 누리지 못한 채 외교인의 첩이나 노비가 되어 팔려갔고 이후 박해는 5년간 지속됐으며, 부친의 묘 도굴 사건으로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격화된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1877년 12월 6일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사 칼레ㆍ마르티노ㆍ리샤르 신부 등도 페롱 신부의 무모한 행동이 박해를 가중시켰다며 그의 조선 재입국을 반대했다.
 

1869년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싱가포르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롱 신부에게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인도 퐁디셰리 포교지 주교가 신부님을 받아들였으니 그곳에서 성직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이 기사는 지난 9월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주최한 병인 순교 1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박해와 양요: 덕산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 1900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페롱 신부 사제수품 50주년 행사 후 사제단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첫줄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페롱 신부.
▲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 증언을 위해 1900년 4월 방한한 페롱(왼쪽)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신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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