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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순교 150주년-역사신문] 박해의 칼날, 밀양 등 교우촌을 쑥대밭으로

[병인순교 150주년-역사신문] 박해의 칼날, 밀양 등 교우촌을 쑥대밭으로

제12호 병인박해 점검(4)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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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2 발행 [1383호]
제12호 병인박해 점검(4) 경상도

▲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박해를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충청도 신자들에 의해서다. 경상도에 복음을 전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황일광이 관헌들에게 잡혀가고 있다. 탁희성 그림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790년대 후반이다. 충청도 지역 신자들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퍼져 나갔다. 특히 안동, 문경, 상주, 풍기 등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많이 이주했다. 1798년 경상도로 이주한 충청도 홍주 출신인 황일광(시몬, 1757~1802)과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 1768~1816) 순교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1815년과 1827년에 체포된 경상도 북부 지역 신자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 온 이들이었다.

경상도 남부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유배 온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언양으로 유배 간 김범우(토마스, 1751~1787)다. 아울러 경상도 북부 지역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동래, 김해, 밀양, 언양 등지로 이주하면서 경상도 남부 지역 신앙 전파에 한몫했다.

이런 이유로 경상도 지역 교우촌은 충청도와 맞닿아 있는 경상도 북서부 지역과 남쪽 해안가 지역에 집중 형성됐고, 두 지역을 제외한 내륙 중부권에는 신자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경상도 중부 내륙으로 신자들이 모여 산 것은 19세기 중반에 와서다. 따라서 선산, 성주, 김천, 경주, 청도, 영천, 군위, 칠곡, 대구, 울산, 동래, 김해, 산청, 창원 등지의 교우촌은 1860년대에 생겨난 것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1861년 10월 조선 교회 전체를 8개 사목구로 나눌 때 경상도에 서북부와 서부 2개 지역을 설정한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도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 초기부터 피해를 보았다.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를 체포해 본격적인 박해의 불씨를 당기기 전인 1월 26일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 요한이 문경에서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1866년 현재 경상도 서북부 사목구는 페롱 신부가, 경상도 서부 사목구는 칼레 신부가 담당하고 있다. 리델 신부도 경상도 지역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 세 신부는 지난 2월 23일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위앵ㆍ오메트르 신부가 체포돼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긴급회의를 한 후 박해 소식을 프랑스에 알리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하기로 했다. 먼저 리델 신부가 장치선ㆍ최선일 등과 함께 7월 1일 중국으로 떠났고, 페롱ㆍ칼레 신부는 10월 11일 탈출해 같은 달 26일 체푸에 도착했다. 이들의 탈출로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올 한해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박해지는 밀양이다. 포졸들의 습격으로 경상감영으로 압송된 신자들 가운데 밀양 백산 출신 오야고보(42)가 3월 15일에, 밀양 명례에 사는 신석복(마르코, 39)이 3월 31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3월 성직자와 조선 교회 지도급 인사들의 순교 이후 경상도 지역의 박해도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 9월부터 석 달간의 병인양요 사건 이후 11월 21일부터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제2차 박해가 다시 시작됐다. 경상도에서도 상주, 문경 한실과 여우목, 진주, 함안, 대구, 통영 지역 교우촌이 박해의 불길로 쑥대밭이 됐다. 이때 체포된 이윤일(요한), 박상근(마티아), 정창문(안토니오), 구한선(타대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등의 사형이 설 전인 내년 1월 초에 집행될 예정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신석복(마르코, 1828~1866)은 밀양 명례에서 태어났다. 순교하기 10여 년 전인 20대 후반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웁실 출신인 김부연을 아내로 맞아 5명의 자녀를 뒀다. 소금과 누룩 장수였던 그는 진해 웅천 장터를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올해 초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대구의 경상감영 포졸들이 명례까지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신석복의 집을 약탈해 재산을 탈취하고, 집이 보이는 가동 나루터 인근에서 잠복해 있다가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체포했다.

포졸들은 하룻밤 사이에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석방을 빌미로 가족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가족은 돈 80냥을 가지고 따라와 포졸들과 협상했다. 이를 안 신석복은 가족에게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의 당부는 초대 교회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의 말과 닮았다.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12월 20일 로마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돼 순교했다. 그는 순교하기 전 로마 신자들에게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제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 두십시오.…형제들이여, 나를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이 생명을 얻는 데 방해하지 마십시오”라고 간곡히 청했다.

신석복은 이처럼 가족에겐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고 당부했지만, 포졸들에겐 “나를 놓아 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대구 경상감영에서 세 차례 모진 형벌을 받았다. 그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옷은 피로 물들었다.

신석복은 3월 31일 경상감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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