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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150주년-역사신문] 대원군, “러시아 막아주면 신앙 자유 허용” 제안

[병인박해 150주년-역사신문] 대원군, “러시아 막아주면 신앙 자유 허용” 제안

제1호 186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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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4 발행 [1349호]
제1호 1864년 8월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병인박해 역사신문’을 연재합니다. 가장 많은 신앙 선조가 순교한 병인박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고, 얼마나 많은 분이 시련 속에서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살펴봅니다.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 과거 시점으로 기사를 전합니다. 기사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순교자 증언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인용 또는 정리합니다.

흥선대원군 베르뇌 주교 비밀리에 접촉...어떤 대화 오갔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러시아 남하를 막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천주교 측에 비밀 제안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아울러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의 제안을 “조선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나라와 종교가 다르므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거절한 사실도 확인됐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장경일, 파리외방전교회) 주교는 18일 대원군이 자신과 안면이 있는 관리를 통해 비밀 접촉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사실을 같은 날 작성한 편지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자 알브랑 신부에게 알렸다.

편지에는 “대원군이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내 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이교도 관장을 통해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덧붙여 그는 “조만간 조선에 자리 잡을 길을 생각해내고야 말 러시아가 이 나라를 위협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다”며 “이 위험은 시급히 예방해야 한다”며 우려했다. 러시아는 지난 2월 두만강 접경 도시 경흥에서 조정에 통상을 요구한 바 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고, 또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드러났다.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은 천주교를 좋은 것으로 알고, 서양인 선교사 8명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며 “그의 아내 또한 교리문답과 기도문 몇 가지를 익혔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자신에게 청했다”고 밝혔다.

베르뇌 주교는 현 조정 상황에 대해 “천주교에 가장 극단적 조치를 취할 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대신이 됐다”며 “호의적인 사람들과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복잡한 심경을 알브랑 신부에게 토로했다.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비밀 접촉, 왜 성과 없었나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의 남하만 막아주면 천주교 박해를 종식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각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중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 때문이라는 게 가장 신빙성 있는 해석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를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물리치고자 ‘이이제이’ (以夷制夷, 오랑캐의 힘으로 다른 오랑캐를 처치한다) 방책 차원에서 프랑스인 베르뇌 주교와 접촉한 게 분명하다.
 

러시아는 1860년 영국ㆍ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할 때 이를 중재한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 연해주 땅을 차지했다. 이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는 올해 2월 국경을 넘어와 경흥에서 통상과 국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바 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서양 국가들의 위협이 한반도에 미친 첫 번째 사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국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대책 마련 차원에서 베르뇌 주교와 접촉한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조정 내에 위기의식을 고양시켰다. 조정은 현재 북병사(北兵使)와 해당 지방관에게 러시아인을 도운 자를 찾아 죄를 묻고, 국경 일대 특히 연변 각처의 경계 강화 조치를 통보해 놓은 상태이다.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된 것은 1856년 애로우호 사건부터다. 이 사건으로 시작된 제2차 아편전쟁은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이 청나라 북경을 점령하고 북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마무리됐다. 조약 내용은 △외교 사절 북경 주재권 확인 △외국인 중국 내 여행 권리 인정 △그리스도교 선교 자유 인정 △구룡반도 영국 할양 등이었다.
 

일본의 경우 1853년 미 함대가 내항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한 것을 계기로, 그 이듬해 미·일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에 문을 열게 됐다.
 

1848년 조선에도 외국 선박이 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경도 바다에 자주 출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뭍에 내려 물을 긷거나 고래를 잡아 식량으로 삼는 수준이었을 뿐 통상 요구는 없었다.

백슬기 기자


흥선대원군 국내 실권 장악



흥선군 이하응(44)이 지난해(1863) 12월 대원군(大院君)으로 임명된 후, 어린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조씨에게 모든 정책에 관한 실권을 비공식적으로 위임받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2월 최고 의결기구인 비변사의 역할이 대폭 조정된 막후에는 실질적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된 흥선대원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삼포왜란(1510) 이후 국정을 총괄해 온 비변사의 역할을 외교ㆍ국방ㆍ치안 등으로 대폭 축소하고, 일반 행정사무는 행정기구인 의정부로 이관한 것도 대원군의 작품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지난 4월 안동 김씨 세력인 영의정 김좌근이 실각한 배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입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1820년 출생, 헌종의 7촌 아저씨, 철종과는 6촌인 왕족이다. 그는 사도세자 사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주정꾼 행세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는 철종이 후사 없이 병에 걸린 것을 알고 조 대왕대비의 동생 조성하에게 접근, 조 대왕대비와 은밀히 접촉하며 둘째 아들 명복의 존재를 알렸다. 또 지난해 철종 승하 후 원로 대신 정원용ㆍ조두순과 긴밀히 접촉, 둘째 아들 명복을 보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대원군’은 선왕이 후사 없이 승하한 경우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할 때, 새 왕의 생부에게 주던 존호다. 지금까지 덕흥ㆍ정원ㆍ전계군은 모두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존됐지만 흥선군은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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