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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야기] <30> 나지르

삼손·사무엘·마리아는 OOO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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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발행 [1284호]
삼손·사무엘·마리아는 OOO인이다

▲ 나지르는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손이다. 그림은 도메니코 피아 셀라 작품 ‘삼손과 데릴라’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처럼 성경 시대 유다인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서원을 통해 일생을 멀리하고 기도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들을 ‘나지르’라 불렀다.

나지르는 우리말로 ‘따로 떼어놓인 사람’이란 뜻으로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 ‘하느님께 스스로 봉헌된 사람’을 가리켰다. 이 말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나지르를 일반인들과 다르게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거룩하게 성별해 태어나게 한 사람으로 여겼다.

나지르로 서원하기 위해선 일정 기간 여느 사람과 달리 특별한 생활을 해야 했다. 나지르는 술은 물론 포도나무에서 난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고, 부정한 것들을 일절 금하며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했다(민수 6,2-71). 구약 시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피와 한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자도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서약 조건을 지키면 나지르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나지르는 삼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의 잉태를 예고했고, 삼손이 태어났다(판관 13장).

마지막 판관이었고 예언자였던 사무엘도 평생 나지르였다. 사무엘 역시 아기를 낳지 못하던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이었다(1사무 1,11 참조). 하지만 삼손과 사무엘은 큰 차이가 있다. 삼손과 달리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주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자원해 세워진 나지르였다.

가장 대표적인 여자 나지르는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다. 또 천사의 예고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고 말한 동정 마리아의 응답은 나지르의 서원을 의미한다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일정 기간만 나지르 서원을 지키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일정 기간 나지르로 서약해 술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금하고, 부정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세 규정을 지키다가 서원 기간이 끝나면 만남의 장막 문간에 나와서 속죄 제물과 번제물 등 각종 제물을 바치고 머리카락을 잘라 불에 태워 서원을 해소했다(민수 6,13-21). 탈무드에서는 서원 기간이 명시되지 않는 경우 보통 30일을 가리킨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일시 서원 나지르 풍습은 구약 말기와 신약 시대까지 지속됐다. 마카베오 상권 3장 49-51절은 성전이 이방인들로 더럽혀져서 서원 기간이 끝났으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바칠 수 없는 나지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야고보 사도의 충고에 따라 바오로 사도가 그를 미워하는 유다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서원 기간을 마친 나지르 4명의 봉헌 비용을 댄 기록이 나온다(사도 21,23-26).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 서원한 일로 코린토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사도 18,18)를 두고도 나지르 서원의 해소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요한 세례자가 포도주나 독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루카 1,15)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토대로 요한 세례자 역시 나지르로 보는 성서학자도 적지 않다.

더불어 마태오 복음 2장 23절 “그는 나자렛 사람(헬라어로 ‘나조라이오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한 대목을 두고 예수님께서 나지르였음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께 열심한 마음으로 특별한 서원 기간을 명시하지 않고도 남녀 누구나 나지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광야에서 신앙 수련을 했다. 광야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명상하기에 적합한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는 것을 실제로 광야를 말하기보다 영적으로 공허한 장소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광야에 머문다’는 표현은 오늘날 ‘피정’과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다인의 나지르 서원 풍습은 예수님 시대 이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한동안 이어져 오다 중세 때 완전히 사라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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