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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5. 사랑으로 열매맺는 신앙 - <1> 왜 '사랑의 봉사'에 나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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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 발행 [1237호]
5. 사랑으로 열매맺는 신앙 - <1> 왜 '사랑의 봉사'에 나서야 하나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말씀처럼 어려운 이에게 이웃이 돼 줄 수 있어야 한다. 2010년 11월 서울대교구청 별관 주차장에서 열린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김장나눔 행사 '나눔은 희망입니다'에 참가한 봉사자들이 불우이웃 가정에 전할 김치를 담그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1. 수메르, 미케네, 로마, 파리. 문명은 항상 소도시로부터 비롯됐다. 위대한 발견, 새로운 발명, 혁신적 아이디어. 세상을 바꾸는 모든 변화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우리는 어울려 산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나아간다. 심리적 안정감, 사회적 보호, 희망의 성취까지도. 개인으로는 생의 기초적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모든 능력을 갖춘 존재는 전능하신 하느님밖에 없다. 농부에게도 시인이 필요하고, 학자에게도 노동자가 필요하다.

 조직이 있는 이유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다. 혼자선 비행기를 만들 수 없지만, 제도적 지식으론 가능하다. 역사와 문화, 도서관에 쌓인 책은 축적된 인류의 자산이다. 화마(火魔)에 휩싸인 인간은 소방관의 도움으로 살아 나온다. 소방관도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불을 끄러 들어가지 않는다. 관창수는 수압을 몸으로 받아내고, 보조수는 관창수를 지탱한다. 서로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는가? 창조와 보존은 구원이라는 바퀴를 굴리는 두 축이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창조하는 인간도, 보존하는 인간도 하느님을 닮았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노력을 쏟는 인간은 하느님의 상징이다. 모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노력을 우린 '사랑'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사랑 속에서 하느님 얼굴을 드러낸다. 만일 선함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이 악이고,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을 죄라 부른다. 모든 존재는 생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2. 소외, 상실, 소멸, 자살. 고립된 인간은 죽는다. 가장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버려진 인간이다. 가장 위태로운 인간은 생명의 끈을 놓친 인간이다. 혼자서 자족하는 인간은 교만한 인간이고 스스로 제외된 인간이다.

 성경적 의미로 혼자 자족하는 인간이 '부자'다. 돈만 많아 부자가 아니다. 스스로 충분해서 하느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부자다. 내 생각, 내 재산, 내 시간, 내 사람. 혼자 다 가지고 있으니, 굳이 기도할 이유가 없다. 부자가 바라는 영생이 있다면 오직 연장된 현세일 뿐인 것이다.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 그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스스로 충분한 자들이었다. 율법과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었고, 스스로 늘 옳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충분한 부자를 향해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마태 12,34)이라 불렀다.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인 죄악의 원흉이다. 원조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은총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자기 뿌리도 모르는 셈이니 요즘 같으면 '홀로' 자식이 된 것이다. 스스로 충분한 부자, 홀로 자식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 한마음한몸운동본부 1000번째 '생애 첫 기부'에 참여한 아기들과 가족들이 조규만 주교, 김용태ㆍ정성환 신부와 함께 축하 케이크 불을 끄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3. 부자와 빈자에 관한 루카의 세계관은 좀 더 직설적이다. 루카복음 속 '거지 라자로'의 비유는 부자의 종말 이야기다. 호의호식하던 부자는 죽어 영원한 불에 떨어졌다. 타는 목마름 속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아무도 오갈 수 없는 깊은 구렁, 무한한 벽. 소방관도 끌 수 없는 불. 완전한 고립. 지옥이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 아니신가? 아브라함도 축복에 힘입어 부자로 살지 않았던가? 왜 이런 극단적 비극이 벌어졌을까?

 부자는 좋은 옷에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몰골을 한 비참한 거지였다. 둘은 매일 눈을 마주치는 사이였다. 라자로는 부잣집 대문간에서 구걸했으므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라도 먹기를 바라는 거지. 라자로의 더러운 몸, 진물이 흐르는 종기를 핥고 가는 강아지. 부자와 거지는 둘 다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였다.

 그렇다. 잘 먹고 잘 산 건 죄가 아니다. 형제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 죄다. 날마다 그리고 수시로. 대문을 오가며 매일같이 그 비참함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형제가, 아니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인도 국민의 지도자, 간디는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인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말이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이 하신다. 종교나 신분, 조건이나 자격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신부, 장군, 박사라서 가는 곳이 아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가는 곳이다.


 4. 인(仁), 자비, 용서.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가르친다. 완성된 종교적 사랑은 윤리나 도덕, 원리나 교리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어코 실행되고 실천될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나이 예순에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했다. 터키 어느 마을, 겨우 구한 잠자리에 대한 보답을 500리라로 표현했다. 하지만 독실한 이슬람 신도였던 주인은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알라의 뜻을 실천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식사에 초대할 때 가난한 자를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이 세상 속의 사랑이 자선과 희생이다. 자선과 희생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랑도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 실재요 실물이다. 멈춘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 체험되는 것이다. 주고, 나누고, 느껴서 도무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확실한 대상이 있다. 가족, 친구, 취미, 개, 돈, 일. 구체적으로 지향하고, 차고 넘치게 움직여서 관념적일 수 없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에너지 같은 것이어서 과거형일 수가 없다. '예전에 사랑했습니다''다음에 사랑하겠습니다''2% 사랑, 30% 사랑' 그런 사랑은 없다. '당신을 사랑합니다''진심입니다' 사랑은 지금 하는 것이며, 작지만 확실한 모든 것이다.

 율법학자의 사랑은 대상이 불분명한 관념적인 계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현재적 실천이었다. 그래서 반문하신다. "누가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냐?"(루카 10,36 참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 이석균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사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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