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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30·끝>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1위

[하느님의 종 125위]-<30·끝>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1위

시복시성, 우리의 참다운 믿음살이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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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발행 [1210호]
시복시성, 우리의 참다운 믿음살이로 완성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교회가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 문서를 제출한 시점이 2009년 6월이니, 벌써 3년 10개월째로 접어든다. 그간 '예비심사 조서에 대한 법적 유효성 인정 교령'에 이어 '하느님의 종 124위 교령', 124위 시복 문서의 '법적 유효성 연구 결과물'에 대한 공인사본 같은 교황청 심사 결과 자료들이 한국교회에 도착하는 등 시복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돼 왔다. 올해 12월 안으로 순교자 124위에 대한 법적 검토가 끝날 것이라는 긍정적 답변을 시성성 관계자들에게 듣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발맞춰 한국천주교회도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한국평협(회장 최홍준)은 2011년 12월 23일 시성성에 대표단을 파견, 한 해 동안 각 교구 평협과 함께 대대적으로 펼친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시성 청원 기도운동 성과물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각 교구별로, 교구 순교자현양단체별로 125위 시복을 위한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평화신문은 2011년 창간 23돌 기획으로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를 마련, 시복 시성을 위한 기도와 현양 운동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면서 하느님 종 125위의 믿음살이를 살펴보는 기획 시리즈를 거의 2년 동안 해왔다.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들을 가리킨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사상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는"(필리 3,8 참조) 확고한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에 근접한 시기를 살다간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도 같은 고백을 한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현세 어느 왕국도 내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세상 끝까지 통치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죽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지난 2년간 지면을 통해 살펴본 순교자들, 곧 최창현을 시작으로 홍낙민ㆍ재영 부자에 이르기까지 48위 또한 한결같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고백했다. 대표적으로 순교자 김종교(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이를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1801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다.

 시복시성 운동은 사실 이같은 순교자들의 한 생애와 영성을 본받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 곧 영웅적 성덕을 본받고 그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것이 바로 시복시성이고, 그것이 시복시성의 진정한 의미다. 결국 순교자와 증거자에 대한 시복시성은 시복시성 대상자가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참다운 믿음살이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 시리즈는 48위의 생애를 조명하고 이번 호로 마무리한다. 48위로 마치는 것은 이후 순교자들의 삶은 순교 시기만 다를 뿐이지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증언한 삶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마치면서 다루지 못한 77위를 포함해 전체 125위 순교자들을 순교 시기별로 정리한다.


▲ 김겸순 수녀 작 '순교의 믿음' , 45x45cm, 나무 위에 아사천, 유채, 2013년. 지난 2월 서울 명동 평화화랑에서 열린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정기전인 '아! 서소문' 전 출품작이다.




   ▶신유(1801년) 박해 이전 순교자들

 신유박해(1801년) 이전 순교자들은 조선교회 창립 시기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신해박해(1791년) 2위를 비롯해 1793년(계축년) 박해 1위, 을묘박해(1795년) 3위, 1798년(무오년) 박해 1위, 1799년(기미년) 박해 4위, 1800년(경신년) 박해 3위, 신유박해 41위, 1802년(임술년) 박해 12위 등 모두 67위다.

 125위 가운데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들이 절반을 넘는 셈이다. 신유년(1801년) 순교자는 41위지만, 이듬해 임술년(1802년) 순교자까지는 사실상 신유박해 당시 체포된 이들이 대다수여서 사실상 신유박해 순교자는 53위나 된다.

 시복건 명칭에 등장하는 대표적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그리고 권상연(야고보)은 함께 조상제사 금지령을 따르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름으로써 신해박해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하고 증인이 됐다.

 이어지는 1793년 박해에선 원시장(베드로)이, 1795년 을묘박해에선 윤유일(바오로)과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등이 목숨을 바친다. 1798년 순교자 이도기(바오로)나 1799년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ㆍ박취득(라우렌시오)ㆍ원시보(야고보)ㆍ정산필(베드로), 1800년 순교자 배관겸(프란치스코)ㆍ인언민(마르티노)ㆍ이보현(프란치스코) 등은 모두 내포교회(대전교구) 순교자들로, 이들은 내포교회 신앙의 빛나는 뿌리가 됐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53위나 돼 일일이 다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다만
신유박해 당시 서소문 밖 순교자는 25위, 포도청 순교자는 2위나 된다. 여타 순교지는 경기도 여주ㆍ양근, 충청도 공주ㆍ예산ㆍ대흥, 전라도 김제ㆍ전주ㆍ무장 등지다. 이 중 서소문 밖 순교자 25위는 서소문 순교성지가 왜 순교성지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춰야 하는지, 정부 또한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에 왜 협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해(1839년) 박해 전후 순교자들

 103위 성인은 기해ㆍ병오 박해 순교자가 79위, 병인박해 순교자가 24위다. 이미 이 시기 많은 순교자가 시복시성 됐기에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기해박해 전후 순교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37위에 그친다.

 신유박해 이후 꾸준한 전교와 조선교회 정비, 성직자 영입 운동을 통해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됐지만, 그 뒤로도 교회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럼에도 1814년(갑술년) 1위, 1815년(을해년) 5위, 1816년(병자년) 7위, 1819년(기묘년) 2위, 1827년(정해년) 2위, 1828년(무자년) 1위, 1835년(을미년) 1위 등 꾸준하게 순교자를 냈다. 4대박해 중 하나인 1839년 기해박해 때는 13위, 이듬해 1840년(경자년) 박해 때 5위까지 합치면 기해박해로 사실상 18위가 순교의 화관을 썼다.

 1814년에서 1840년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은 경상도 대구와 전라도 전주 순교자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대구에서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과 김시우(알렉시오) 등 17위, 전주에서 이경언(바오로)과 이일언(욥) 등 13위가 순교했다. 이밖에 한양에서 3위, 강원도 원주에서 3위, 충청도 해미에서 1위 등이 순교했다.


 ▶병인(1866년) 박해 이후 순교자들

 병인박해 이후 순교자는 20위로 가장 적다. 1861년 병사한 증거자 최양업 신부를 합쳐도 21위에 그친다. 뭉뚱그려 '병인대박해'라고 하지만, 이를 세분해보면 1866년(병인년) 박해 5위, 1867년(정묘년) 박해 6위, 1868년(무진년)에 8위, 1876년 한불수호조약을 통해 신앙의 자유가 회복된 이후인 1888년(무자년) 박해 1위 등이다.

 병인박해 이후엔 경상도 지역 순교자가 많다. 대구와 함안, 진주, 통영, 상주, 동래, 울산 등지에서 신석복(마르코)와 구한선(타대오) 등 12위가 순교했다. 1867년 당시 한양에서도 송 베네딕토와 송 베드로, 이 안나 등 3위가 순교했고, 충청도 청주에서도 오반지(바오로)와 장 토마스 등 2위가, 충청도 공주에서도 김원중(스테파노) 등 1위가, 경기도 죽산에서도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등 2위가 순교했다.

▲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 시기별 순교 알람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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