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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27>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 종 125위]-<27>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재산·명예·목숨까지 바치며 하느님 증거한 '호남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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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0 발행 [1203호]
재산·명예·목숨까지 바치며 하느님 증거한 '호남의 사도'

   요즘도 50마지기쯤 농사 지을 땅이 있으면 중농으로 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이 소유한 토지는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걸쳐 자그마치 1만 5000마지기나 됐다. 1마지기는 지역별로 계산방법이 150평에서 200평, 300평 등으로 들쭉날쭉하지만, 전라도에선 300평으로 계산하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450만 평 규모다.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487만633㎡(1488ha)이니 어마어마한 대부호였던 셈이다.

 '그집 땅을 밟지 않고는 열 곳이 넘는 동네를 못 지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였던 유항검은 왜 호남의 첫 가톨릭 신자가 됐을까. 그 많은 땅과 재산,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며 '호남의 사도'로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조정에서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을 선고받고 고향인 전주 풍남문 밖으로 끌려가는 유항검. 능지처사라고도 불리는 능지처참형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으로, 유항검을 처형하고자 포졸들이 소를 끌고 가고 있다. 그림=탁희성


  유항검의 출생지는 전주 초남이다. 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다.
 호남 부호였던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 양반가에서 1756년 태어난 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전라도에서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부에 걸맞는 지위는 갖지 못했던 것. 양반인데다 진사였지만, 남인(南人)에 속해 제약이 뒤따랐고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유항검은 경기도 양근 권철신(암브로시오) 집에서 권철신과 문하생들이 서학을 탐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을 접한 유항검은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운다. 그리고서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한다.

 입교 직후 고향으로 돌아온 유항검은 가족과 친척, 노비 등에게 복음을 전한다. 세례 이후 그에겐 빈부귀천이 따로 없게 됐다. 그는 교회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였고, 가난한 이웃과 노비들에게 애긍을 베풀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유항검이 교리를 배우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처음 교리를 듣자마자 그의 올바른 영혼은 진리의 빛을 따랐고, 이를 지체없이 실천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집에 돌아온 뒤로는 많은 가족들에게 이를 알렸는데, 그들 역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가 지방(전주)에서 누리던 크나큰 존경과 영향력은 그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확실히 이 지방 교우공동체의 기반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남부지역의 신부로 지명됐다고 말하기까지 하지만 충분한 증거는 없다.(가성직제도 시행 당시 전라도에서 신부로 임명된 신자는 유항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문모 신부는 (전주에 왔을 때) 유항검의 집에 얼마간 머물렀다."
 
 1786년 가을에는 가성직자단의 신부로 임명돼 미사를 집전하며 성무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이종사촌인 윤지충(바오로)의 집에 자주 모여 동생 유관검(1768~1801, 세례명 미상)과 함께 교리를 연구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사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항검은 이를 이승훈에게 알리고 자신의 성무활동을 즉각 중단했다. 이를 계기로 1789년 겨울 윤유일(바오로)과 함께 북경에 파견되기에 이른다.

 이어 두 번째로 중국 베이징에 파견된 윤유일이 천주교회에선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전하자 유항검은 교회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자 신주를 조상 무덤에 묻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는 당시 많은 양반 교우들이 조상 제사 때문에 교회를 떠난 것과는 상반된 처신이다.

 그런 가운데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이 처형되자 유항검은 7개월 동안 피신해 있다가 자수한 뒤 배교하고 풀려난다.

 하지만 이는 입으로만 배교한 것이었지 마음으로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유항검은 1795년 5월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여 미사를 봉헌하고, 상경해 주 신부를 만났으며, 자주 서신 왕래를 했다.

 1796년 겨울 주 신부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서양의 큰 배가 조선에 와서 외교교섭을 하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베이징대목구장 주교에게 보낼 때는 동생 유관검 등과 함께 돈 400냥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박해가 일어난다. 1801년 신유박해다.

 박해에 앞서 유항검은 자신의 장남 유중철(요한 사도)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루갈다)가 동정부부로 서약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
 
▲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생가가 자리한 초남이 성지엔 국내외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들어 그 치열했던 순교 신심을 배우고 있다.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주도세력은 처음부터 유항검과 그의 가족을 노렸다. 그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그해 3월 전라도 신자 가운데 최초로 체포된 그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형조로 이송돼 문초를 받았고, 그해 9월에는 형조 전옥서에서 다시 의금부로 보내져 추국을 받았다.

 혐의는 그 유명한 '대박청래 일장판결(大舶請來一場判決)'이라는 말에 집약돼 있다.

 "서양 군함이 조선에 출병해 조선 조정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한 바탕 결판을 내야 한다"고 동생 유관검이 말했다는 혐의로 형조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는다.

 문초 당시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 주동자로 유항검을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항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이에 조정은 유항검에게 대역부도죄를 적용, 능지처참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따라 전주로 이송된 그는 풍남문 밖에서 순교한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45살이었다.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의 일이다.

 유항검의 가족 중 동정부부 순교자로 유명한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부인 신희, 조카 유중성(마티아) 등도 그의 순교를 전후해 순교의 화관을 썼다. 유항검과 신희, 아들 유중철ㆍ문석 형제, 이순이, 유관검과 그의 부인 이육희 등 순교자 7위의 묘는 전주 치명자 산에 합장돼 있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고,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던 집은 헐어 없애고 그 터에 연못을 만들었다.

 전주교구 초남이성지(전담 하태진 신부)는 날마다 오전 10시 30분(토 오후 3시ㆍ일 오전 11시) 유항검의 고향 생가터에 파놓은 연못 옆 경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문의 : 063-214-5004
 
 다블뤼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항검이 배교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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