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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25> 김이우ㆍ현우,고성대ㆍ성운 형제

[하느님의 종 125위]-<25> 김이우ㆍ현우,고성대ㆍ성운 형제

형ㆍ부모에게 신앙의 보화 물려받아 순교로 신앙 증거한 '믿음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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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3 발행 [1199호]
형ㆍ부모에게 신앙의 보화 물려받아 순교로 신앙 증거한 '믿음의 동반자'

 '하느님의 종' 125위 중엔 '형제'들도 꽤 많다. 같이 입교하고,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며 '믿음의 동반자'로 살아간 혈육들이다.

 '한국천주교회 첫 희생자'로 기록되는 김범우(토마스, 1751~1787)의 동생들인 김이우(바르나바, ?~1801)ㆍ현우(마태오, 1775~1801) 형제와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된 고성대(베드로, ?~1816)ㆍ성운(요셉, ?~1816) 형제다.

▲ 역관 집안 출신인 김범우의 이복형제인 김이우ㆍ현우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함께 체포돼 형은 장을 맞다가, 동생은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림=탁희성


   #김범우 못지않은 이복형제 김이우ㆍ현우

 '명례방공동체'의 주역 김범우의 빛나는 삶에 묻혔지만, 그의 여섯째, 일곱째 서제(庶弟), 곧 이복형제인 김이우ㆍ형우 형제 또한 김범우에 못지않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체포돼 유배간 후에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 형벌의 여독으로 사망한 김범우 못지않는 덕행 실천과 순교의 삶을 이들 형제들은 살아간 것이다.

 김범우의 형제는 모두 여덟이었다. 이 중 세 명이 천주교를 믿고 실천했는데, 바로 맏형 김범우와 이우ㆍ현우 형제다.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이우ㆍ현우 형제는 각각 1801년 5월, 7월에 순교의 화관을 썼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김이우ㆍ현우 형제의 순교에 대해 묘사한다.

 "9명의 순교자들 시체는 폭염과 비가 무척 많이 내리는 며칠 동안 그대로 놔둔 채 있었다. 이들을 매장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아무런 부패 흔적도 없고 살도 온전했으며 얼굴은 건강한 사람들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피도 마치 상처에서 방금 흘러내린 듯 굳지도 않은 채 신선하게 남아있었다. 이 같은 경이로움은 교우들과 외교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김현우는 체포됐을 때 자식들이 우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 앞에 나타나 길을 가리키고 있던 큰 십자가만을 응시하며 따라갔다. 신앙을 위해 참수된 공적을 쌓은 4명의 고백자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김범우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이우ㆍ현우 형제는 한양의 유명한 역관 집안 출신 '서자'다. 서얼의 한계를 누구보다 체감하며 자라난 이들 형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뜻밖에 맏형 김범우였다. 맏형에게 교리를 배운 형제들은 명례방 사건으로 맏형이 유배를 가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그럼에도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비밀리에 기도생활을 지속했고, 1794년 말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더 열심히 교회활동에 참여했다. 홍필주(필립보)의 집으로 가서 주 신부를 만났고, 정인혁(타데오)ㆍ최필제(베드로)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명례방공동체를 잇는 이 신앙공동체는 명도회로 발전한다. 주 신부가 박해 위험으로 김이우의 집을 피신처로 삼자 동생 현우는 그곳으로 가 미사에 참례했고 형제는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에 가입해 활동한다.

 그러나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가는 믿음살이 기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이들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포도청에선 형제에게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하고 그간 행적을 추궁한다.
 그러나 형제는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어느 누구의 행적도 밀고하지 않는다. 그 뒤 형조로 이송돼 굳센 신앙의 의지로 형벌을 이겨내고 순교한다.

 이들 형제에 대한 사형선고문이 「순조실록」 권3(순조 원년 5월 22일), 「사학징의」 권1 등에 전해진다.

 "3형제가 함께 천주교에 빠져 똑같은 악행을 함께 저질렀으며, 남녀가 뒤섞여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외웠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릇된 길로 이끌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비록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천주교는 끝내 옳은 것'이라고 했다."
 

▲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전주에서 배교했으나 1815년 을해박해 당시 다시 체포된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경주관아를 거쳐 대구감영 옥사에 수감돼 17개월에 이르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짚신을 삼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림=탁희성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된 고성대ㆍ성운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충청도 덕산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이다.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지만, 형제들은 곧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특히 형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형제는 매일 시간을 정해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모든 신자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또 언제나 합심해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던 형제에게 감복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죽음의 유혹은 형 고성대(일명 여빈)에게 신앙의 고비였다. 신유박해 당시 전라도 고산 저구리골(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에 이주해 살다가 체포돼 전주관아에서 고문을 당하던 고성대는 처음엔 용기있게 신앙을 고백하다가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에 굴복해 풀려난다.

 이후 "이 엄청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선 내게 단칼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되뇌곤 하던 고성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우 성운(일명 성일)과 함께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한 뒤에도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815년 2월 22일께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 급습한 경주 관아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이것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 관리에 의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당시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급습한 줄 알고 동생 성운의 지시에 따라 힘으로 대적했다. 그러나 이내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신자들은 저항을 멈췄고 형제는 포승을 받는다.

 경주로 압송된 형제들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다. 이에 경주 관장은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또 다른 교우들을 대구감영으로 이송한다.

 대구에서도 또 다시 문초와 형벌이 이어지면서 17개월이 넘는 옥중생활을 해야 했지만 형제는 고통을 참아내며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했다. 그 오랜 기간 고통과 궁핍에도 형제는 항상 기쁨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형제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켰다고 전해진다.(「일성록」 순조 병자년(1816년 11월 8일자) 기록 참조)

 대구 감사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형제를 지켜본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돼 깨달을 줄을 모르며, 엄한 형벌로 깨우쳐주려 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이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드디어 1816년 12월 19일 대구 형장에서 구성열(바르바라, ?~1816) 등 5명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진다. 순교 뒤 형제 등 7명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4월 17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거둬졌다.

 이 가운데 매장된 지 3개월이 훌쩍 지난 형제의 육신은 특히 빛이 났고 눈부신 무언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조금 전에 죽은 것처럼 보였고, 잘 보존된 형제의 옷은 습기조차 스며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형제와 순교자 5위의 이름과 덕행 실천, 신앙 고백의 발자취는 모든 교우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빛나는 모범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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