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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9) 윤점혜(아가타,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9) 윤점혜(아가타, ?~1801년)

순결한 주님의 종, 우윳빛 피 흘리며 기쁘게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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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 발행 [1183호]
순결한 주님의 종, 우윳빛 피 흘리며 기쁘게 순교

   가톨릭 신자에게 세례명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세례 때 받은 제 2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이름, 즉 본명(本名)이라고 부르며 수호성인의 삶과 신앙을 따르고자 노력한다. 밖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내세울 수 없었던 한국교회 초창기 신자들은 더욱 그러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여러 동정녀 가운데 행적이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꼽히는 윤점혜(아가타, 1778?~1801)도 마찬가지였다.


 3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아가타는 평생을 하느님께 동정으로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살던 중 순교한 성녀. 윤점혜는 "나도 아가타 성녀처럼 살다가 순교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동정으로 살다가 신유박해 때 짧은 생을 마감했다.

▲ 양근성지에 있는 윤점혜 동상.


   윤점혜는 1778년께 태어나 경기도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다. 일찍이 어머니 이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점혜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자 동정생활을 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점혜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 어머니가 마련해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둔 채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윤점혜는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윤유일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갔는데,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크게 질책했음에도 이를 꿋꿋하게 견뎌냈다. 윤점혜는 동정을 지키며 하느님께 더욱 헌신하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의 은혜를 전할 것만 생각했다.

 윤점혜는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동정을 지키고자 과부로 행세했으며, 2년 뒤에는 주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윤점혜는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옮겨 함께 살면서 강완숙을 도와 조선교회 일에 전력했다.

 윤점혜는 주 신부 지시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회장을 맡아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그는 교리를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묵상에 열중함으로써 다른 신자들 모범이 됐다. 어머니를 위해 자주 연도를 바쳤고, 순교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천주학을 고집하는 마음을 고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굳센 신앙심을 보여준 윤점혜는 당시 조선교회에서 강완숙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여인이었다.

 윤점혜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성사를 받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환시를 보았다. 놀랍고 가슴이 벅찼지만 이 환시가 헛된 꿈이거나 악마의 장난이 아닌가 염려스러워 이를 주문모 신부에게 알렸다. 주 신부는 좋게 해석해줌으로써 윤점혜를 안심시켰고, 윤점혜는 평화를 얻고 기도생활에 더욱 증진할 수 있었다.

 윤점혜는 또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다. 성령께서 성모 마리아 위에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은혜가 실제로 하느님 은총 속에서 이뤄진 것인지 감히 말할 수 없어 다시 주 신부에게 영적 지도를 받았다. 그때 마침 성령께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하는 상본을 갖고 있던 주 신부는 그것을 보여주며 윤점혜를 진정시켰다. 윤점혜는 더욱 겸손히 침묵하며 자신의 내적 체험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는 또 자신의 수호성인인 아가타에 대한 공경심으로 가득 차 주위 사람들에게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하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마침내 그의 소원이 이뤄지게 됐다. 1801년 2월, 신유박해 초기에 그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돼 석 달 동안 옥에 갇혀 신문과 갖은 고문을 당했다. 윤점혜를 문초했던 관리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강완숙의 집에 살았던 세월이 10년이나 되며, 강완숙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것을 모두 배웠다. 신부를 접대한 일은 처음에는 없다고 했으나 강완숙의 집에 유숙하면서 주 신부와 함께 내방(內房)에서 남녀가 한데 모여 첨례를 보고 자주 송경을 했는데, 그녀도 역시 그 가운데 참례했고 사학을 매우 열심히 공부해 비록 형벌로 살육을 당하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을 뜻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학에 고혹된 모양은 포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그는 적당히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과부로 지칭했다. 이것은 천주학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하는 상투적 방법이며, 네거리를 쏘다니고 남의 집에 더불어 살며 처녀도 아니요 과부도 아니면서 허씨(許氏)의 아내로 보이게 했다.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인간의 큰 도리인데 작고 어린 한 여자가 그러한 행동을 하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부패시키며, 분명히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도 시집간 사람처럼 하니 이 어찌 천지간에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허씨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행세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한 것이 풍속을 어긴, 천지간에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했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강완숙과 함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강완숙은 한양 서소문 밖에서, 윤점혜는 고향인 양근으로 보내져 참수됐다. 고향 백성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순교 직전 양근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그는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

 윤점혜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순교 당시 그의 목에서 우윳빛이 나는 흰색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 윤점혜가 태어나고 순교한 경기도 양근에 세워진 양근성지.
▲ 윤점혜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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