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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8> 조숙 베드로ㆍ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8> 조숙 베드로ㆍ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

동정의 백합 들고 부부가 함께 순교의 월계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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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9 발행 [1182호]
동정의 백합 들고 부부가 함께 순교의 월계관 쓰다

동정 지키며 몸과 마음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
신유박해 희생자 후손... 성 정하상 뒷바라지
수덕의 삶 살며 복음 전파와 애긍 실천에 헌신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봉헌하기 위해 동정(童貞)을 지킨 동정부부는 교회사에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서양엔 스웨덴 성녀 비르지타의 넷째 딸 가타리나(1332~1381)와 남편,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헨리코 2세(973~1024)와 성녀 구네군다(975~1040) 등이 있다.

 한국천주교회에선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부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동정부부가 유중철ㆍ이순이 부부만 있는 건 아니다.

 조숙(베드로, 1787~1819)ㆍ권천례 (데레사, 1784~1819) 부부도 동정부부였다.

 수도생활이 불가능한 당시 봉건적 사회 상황을 딛고 하느님께 대한 열심한 신앙으로 동정을 지키며 수덕의 삶을 산 아름다운 사례가 18세기 조선에 또 나타난 셈이다.

 두 사람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희생자들의 후예다. 경기도 양근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인 조숙은 조부와 숙부가 희생되자 박해를 피하기 위해 강원도에 있는 외가로 피신해 성장했다. 숙은 관명(冠名)으로, 본래 이름은 명수다. 조숙이 얼마나 출중한 재능을 보였는지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베드로는 범상치 않은 재능이었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했으며, 나이에 비해 점잖았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겪은 박해의 기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주위 환경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교리실천에도 열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신앙적으로 거듭나는 건 권 데레사와 혼인이 결정적 계기였다.

 같은 양근 출신인 권 데레사는 한국천주교회 형성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의 딸이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768~1802)의 동생으로, 6살 때 실학자 안정복의 딸이었던 어머니를 여읜데다 1791년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는 힘든 환경에서 자랐다.
▲ 수원교구 양근성지에 세워진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교우 부부들의 모범이 된 동정부부

 동정 약속은 갑작스러웠다. 성장하면서 사실상 '냉담'에 빠진 조숙은 권 데레사와 혼인한 첫날밤에 '함께 정결을 지키며 살자'고 권고하는 글을 건네받고 마치 딴 사람처럼 마음이 변해 아내의 원의를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 약전에서 이 사연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녀가 그에게 동정부부로 지낼 것을 제의한 데 대해 그는 즉시 동의했으며, 처음부터 서로 오누이로 살 것을 약속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부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하며 살았다. 때때로 동정부부 서원에 거슬리는 유혹을 좀 느끼기도 했으나 유혹을 물리치는 각별한 은총을 얻었고, 이같은 은혜에 부부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곤 했다.…"

 박해로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모든 재산을 잃고, 형제들이 유배되는 것을 보면서도 고통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혼인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살다가 얻은 영신적 승리였기에 권 데레사에게 동정부부로서의 삶은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며 부부는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극기에 몸과 마음을 쏟았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결코 애긍을 잊지 않았다. 동정을 지키며 금욕에 대한 훈련을 하고자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실천했다.

 특히 권 데레사는 몸이 자주 아프고 병치레도 많았지만 영신적 열성으로 고통을 기꺼이 참아냈다. 외관상으론 어떤 불편함이나 배고픔도 내보이지 않았다. 피로함을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받는 삶 속에서도 예수님 따르기만 열망하며 영신적 발전을 위한 일들에 완전히 전념했다.

 독학에 열중한 권 데레사는 다른 이들에 대한 가르침 또한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고, 다른 이들도 그의 말을 들으러 오는 걸 좋아했다. 신앙에 미온적인 교우들을 고무하는 데 애를 썼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죽음의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집 주위에 항상 배우려고 찾아온 교인들로 북적였다. 기도에 전력을 기울이곤 하던 권 데레사는 종종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말을 듣던 모든 이들을 신앙적 열성으로 채웠다. 세속을 멀리하며 오로지 교회 일만 몰두하는 동정부부 모습에 교우들은 다들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동정부부는 각자 자신들을 온전히 성화시키는 데 전념했으며, 15년에 걸친 동정부부의 삶은 교우 부부들의 모범이 됐다.

 동정부부의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건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북경을 드나들던 성 정하상(바오로, 1795~1839)에 대한 뒷바라지였다. 동정부부의 가장 큰 갈망이자 목표는 조선에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정하상이 교회 일을 하고자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동정부부는 늘 성인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는 한편 성직자 영입을 위한 온갖 준비를 도맡았다.

 이때 동정부부의 조력자는 황해도 재령의 평민 집안 출신인 고 바르바라(혹 막달레나)로, 함경북도 무산에 유배된 남편을 따라갔다가 조숙과 친척인 조동섬(유스티노, 1739~1830)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앙의 길로 접어든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유배지에서 남편이 죽자 재령 선산에 유해를 옮긴 뒤 조동섬과 가까운 조숙의 집 근처에 살며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실천하는 데 열심을 보였다.
▲ 1817년 3월 말 남편 조숙이 포도청에 끌려가자 남편의 뒤를 따라 포도청에 자수하는 권 데레사. 그림=탁희성
 


 #"이제 저를 순교의 은총에 불러주시니…"

 그렇지만 동정부부가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조선 신앙공동체와 함께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817년 음력 3월 말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동정부부는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다. 조숙이 가르치던 비신자가 자신의 교회력(敎會曆)을 도적에게 빼앗기면서 관청의 수색이 시작됐고, 조숙은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때 함께 있던 부인 권 데레사와 고 바르바라도 조숙과 헤어지기를 원치 않아 함께 체포됐다.

 문초와 형벌이 계속됐다. 배교를 요구하는 포도대장의 말에도 조숙은 확고하게 신앙을 지킨다.

 당시 그가 옥중에서 쓴 서한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내가 들어선 길은 나로 하여금 예수와 마리아의 계획하심을 누리게 할 목적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의 모든 언사는 서한을 읽는 모든 이로 하여금 절로 감화를 받게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서로 위로를 잊지 않았고, 하느님 은혜에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중에도 동정 부부는 하느님 뜻이 이뤄지기만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때로 좌절의 순간이 조숙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처 권 데레사가 그의 용기를 북돋웠다. 당시 권 데레사의 말이 순교자 약전에 남아 있다.

 "저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은 일찍이 동정을 지킬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허락해 주셨는데 이제 그분께서 저를 순교의 은총에 불러주십니다. 제겐 너무나 과분할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 합당하게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수감된 지 2년이 지나도록 문초와 형벌, 기아, 궁핍을 견뎌내던 조숙은 1819년 7월 12일(음력 5월 21일, 음력 6월 13일이라는 최 브리지타의 증언도 있다) 33살을 일기로 참수 당한다. 같은 날 참수를 당한 권 데레사는 36살, 고 바르바라는 60세를 넘긴 나이였다.

 다만 관변사료인 「일성록」에는 세 순교자가 참수 당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지, 순교지가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인지, 아니면 포도청인지는 알 수 없다.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은 현재 서소문 공원 인근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267번지 임광빌딩 본관 남쪽 광장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포도청은 당시 한양에 두 곳이 있었는데 좌포도청은 현재 종로3가 119소방서 자리, 우포도청은 광화문 네거리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 자리다.

 세 순교자 유해는 한 달 뒤에야 거둬졌으며, 뼈와 머리카락밖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고 전해진다.

 순교의 월계관에 동정의 백합을 곁들인 조숙ㆍ권 데레사 동정부부의 아름다움으로 조선교회는 흠없고 순결한 영광을 획득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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