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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나의 전교일기] <6·끝> 길 잃은 한 마리 어린양을 주님께로

[임보나의 전교일기] <6·끝> 길 잃은 한 마리 어린양을 주님께로

사랑 쏟으면 바른 길로 들어설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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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6 발행 [1180호]
사랑 쏟으면 바른 길로 들어설까 싶어서

▲ 43년 선교사 생활의 영적 동반자가 돼준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의 고국 호주를 방문했을 때. 조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의 모범을 보여준 선교사제다.


  선교사에게 가장 큰 보람이라면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쳐 그가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43년 간 선교사로 살아오면서 지칠 때마다 그런 보람이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도 많았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강원도 인제 겟세마니 피정의 집에서 만난 17살 김군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던 김군

 김군은 툭하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좀도둑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김군은 7살 때부터 구멍가게에서 과자와 빵을 훔쳐먹기 시작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자 전문적으로 빈집을 털러 다녔다.

 그 아이가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찾아온 곳이 피정의 집 근처에 있는 큰댁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사를 온 뒤부터 동네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집을 비우기만 하면 현금이나 귀중품이 없어지는 통에 동네 사람들 원성이 높았다. 어느 날 밤인가는 성당 2층 유리창으로 침입해 미사주를 가져가기도 했다. 아이는 서양 사람인 조 필립보 신부님이 돈깨나 있을 줄 알고 사제관을 노렸다.

 하루는 김군이 또 성당에 와서 기웃거리기에 사제관에 데려가 차를 끓여줬다. 속옷도 손수 기워 입으시는 신부님의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면서 성당에 나오라고 권해봤다. 김군은 몇 번 성당에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발길을 끊었다.

 김군은 어디선가 훔쳐온 듯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먼 곳까지 도둑질하러 다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먹을 것을 들고 매주 한 번씩 병문안을 가서 말을 붙였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좋은 말로 타일렀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려면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단다. 애인이 너의 좋지 않은 행실을 알면 떠나버릴 거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다 잊고 앞으로 성실하게 살아라. 내가 도와줄게."

 김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때뿐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마음을 잡는가 싶더니 고등학교에 침입해 컴퓨터를 훔쳐 나오다가 붙잡혔다. 곧바로 춘천소년원에 수감됐다. 걱정한 대로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돼 버렸다.

 김군이 소년원에 들어가자 주민들은 동네가 조용해졌다며 좋아했다. 나는 몇 번 면회를 가서 사식을 넣어주면서 위로하고 격려해줬다. 김군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군이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번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큰댁에서 얌전히 지냈다. 나는 신부님께 "그 애가 택시라도 몰 수 있게 운전면허증 따는 걸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신부님은 회의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 어느 중소기업 사장님한테 취직자리를 부탁했다. 사장님은 "데려다가 사람 만들겠다"고 하셨다. 김군을 타일러서 서울에 보냈지만 사흘 만에 뛰쳐나왔다. 일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바른길 인도하려고 애썼지만

 김군이 이번에는 승용차를 훔쳐 몰고 다니다 경찰에 체포됐다. 또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 역시 또 소년원을 들락거리며 바른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출소하면 서울 돈보스코 기술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김군이 재판을 받는 날, 춘천교구 아무개 신부님이 책임지고 선도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김군이 정신 차리고 기술을 배우겠다기에, 나는 옷 한 벌을 사주고, 조 신부님은 불고깃집에 데려가 영양보충까지 시켜줬다. 밥을 먹이면서 다시 타일렀다. "정말 잘 생각했다. 거기서 기술 배우고 공부하면 사회에 나가서 떳떳하게 살 수 있단다."

 돈보스코 기술학교에는 이미 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웬걸, 면접 보러 서울 가는 날,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 공부하기 싫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신부님은 내가 타이르는 모습을 보시고 조금 화가 나신 듯했다.

 "싫으면 가지 마세요. 자유 있습니다. 용돈 필요하면 오세요. 내가 조금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나쁜 짓 하지 마세요."

 김군은 넉살 좋게도 신부님께 몇 번인가 용돈을 받아갔다. 얼마 후 입영통지서가 나오자 큰댁 식구들은 "군대 가서 고생하고 나오면 사람 될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입영마저도 거부됐다. 그 후 얼마 동안 김군이 보이지 않았다. 속초에서 중화식당 배달원으로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를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나는 1998년 은퇴한 후 그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마음을 썼던 김군이 자꾸 눈에 밟혔다. 조금만 더 공을 들이면, 그리고 조금만 더 사랑을 쏟으면 바른길로 들어설 것 같은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하도 소식이 궁금해서 몇 달 후 큰댁에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또 무슨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제는 소년원이 아니라 교도소였다. 가슴이 턱 막혔다. 전화를 끊고 기도실에 앉아 촛불을 켰다.

 "주님, 제 능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나이가 어느새 70이 됐습니다. 이제 힘이 없습니다. 그 아이를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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