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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시리즈]-(14) 최창주ㆍ이중배ㆍ원경도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시리즈]-(14) 최창주ㆍ이중배ㆍ원경도

고향땅을 순교의 피로 적신 '여주 교회사의 빛나는 보석'... 양반 출신으로 가족 입교시키고 조상제사 폐지... 신유박해 때 다함께 붙잡혀 같은 장소에서 순교... 서로 용기 북돋우며 신앙 증거하며 해읍정법 판결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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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발행 [1164호]
고향땅을 순교의 피로 적신 '여주 교회사의 빛나는 보석'... 양반 출신으로 가족 입교시키고 조상제사 폐지... 신유박해 때 다함께 붙잡혀 같은 장소에서 순교... 서로 용기 북돋우며 신앙 증거하며 해읍정법 판결받아

   여주로 떠난다. 이 땅에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주어사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 여주(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1리)다. 1779년 권철신(암브로시오) 주도로 한역 서학서 강론이 이뤄진 앵자봉 아래 주어사를 품에 끌어안고 있는 여주는 동시에 순교의 땅이다.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을 추진 중인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운데 경기도 여주 출신 순교자는 9위에 이른다. 여주는 그만큼 우리나라 복음화 여정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못자리다. 그 중 첫 손가락은 한국천주교회 첫 밀사이자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 영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윤유일(바오로, 1760~95)이 꼽힌다. 또 윤유일 동생 윤유오(야고보, ?~1801)가 있고, 교회 설립 시기 이현(안토니오, ?~1801), 정광수(바르나바, ?~1802)ㆍ순매(바르바라, 1777~1801) 남매도 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의 딸 최조이(바르바라, 1790~1801)도 여주 출신이다.

 그렇다고 신유박해 순교자 최창주ㆍ이중배(마르티노, 1751?~1801)ㆍ원경도(요한, 1774~1801)를 간과할 수 없다. 최창주와 원경도는 장인과 사위 사이이고, 이중배와 원경도는 사촌 사이였을 뿐 아니라 다같이 붙잡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순교했다. '여주교회사'에서 또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 된 최창주와 이중배, 원경도의 삶과 신앙으로 들어간다.


   #최창주와 원경도는 장인과 사위 사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심지어는 아비의 이름을 잊었다고까지 했다. 그 말뜻이 이미 극도로 흉악하다. 사서를 감춰 뒀고, 끝내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여, 인간 윤리를 버리고 무너뜨렸다. 기꺼이 죽겠다고 했다.…"(최창주 사형판결문)

 "사학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버렸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싸다.…"(이중배)

 "사학에 깊이 빠져 형에게 제사를 폐하도록 권했으니 사람의 도리가 온통 끊어졌다.…"(원경도)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형조 관계 문서를 편집한 「사학징의(邪學懲義)Ⅰ」은 경기감영에서 재판절차를 밟은 최창주와 이중배, 원경도에 대한 사형선고문을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같이 '흉악하다' '죽어도 싸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졌다'고 기록함으로써 유교적 가르침에 근거해 사형을 선고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하나같이 양반이었던 이들이 다른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신앙과 사조를 통해 신분제 사회의 질곡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 했던 의지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맨 먼저 '여종'이라고도 불린 최창주는 양반 출신이다. 경기도 여주 태생인 그는 40대 초반에 뒤늦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뒤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된 그는 광주부윤(경기도 광주) 앞으로 끌려갔으나 배교하고 석방됐다. 관변 사료엔 '배교하고 석방됐다'고 기술돼 있을 뿐이어서 당시 그의 고뇌를 알 길은 없다. 다만 "곧 깊이 뉘우치며 순교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했고, 가족과 이웃에게 더욱 열성적으로 권면했으며, 두 딸을 모두 신자에게 출가시켰다"는 기록이 교회사료에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 '순교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창주와 마찬가지로 경기도 여주 출신 양반인데다 소론(少論) 집안 출신이었지만 첩의 자식, 곧 서얼이었기에 뜻을 펴지 못한 이중배는 용력이 뛰어나고 호쾌한 기상을 갖춘 반면 화를 잘 내는 성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같은 성격은 그가 1797년 천주교를 접하고 사촌 사이인 원경도와 함께 김건순(요사팟, 1776~1801)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나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그는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고 신주를 버렸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과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는데, 이는 「황사영 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불처럼 뜨거웠던 열심'이 그의 가슴 안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경도 역시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이다. 1797년 사촌 이중배와 함께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온 가족을 입교시켰고, 형 원경신을 종용해 조상제사를 폐지했으며, 최창주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 관장과의 대화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한 교우를 대라는 요구에 밀고를 거부하는 최창주 마르첼리노. 그림=탁희성



   #사촌형제 이중배, 원경도가 먼저 투옥

 '여주'를 거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 세 사람이 관아에 붙잡혀 간 것은 1800년 경신년 예수 부활 대축일 무렵이었다. 먼저 이중배와 원경도가 여주관아로 잡혀가 투옥생활을 하며 갖은 형벌을 다 받아야 했다<평화신문 제1161호 2012년 4월 8일자 13면 참조>. 사위 원경도가 관아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와 아내 권유로 피신하기로 한 최창주는 한양으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순교하겠다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포졸들에게 체포돼 여주 감옥에 갇혔다.

 수감 이후 이들의 수난은 여러 사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여주 관장은 특히 최창주에게 알고 있는 신자를 밀고할 것을 강요했지만 최창주는 이를 거부하고 감옥으로 끌려가 형벌을 받는 길을 택했다. 옥중 생활은 이후 6개월간 계속됐다. 고문이 자행되면서 원경도는 여러 차례 상처를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그 상처가 낫고는 했다. 그 와중에 원경도 집안의 늙은 여종이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는 참상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원경도의 마음이 일시 흔들렸으나, 이중배의 도움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1800년 10월 최창주와 동료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된다. 이듬해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감사는 옥에 갇혀 있던 최창주와 동료들을 끌어내 배교를 강요하며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최창주 등은 고문과 혹형에 굴하지 않고 유혹을 뿌리치며 서로 용기를 북돋웠다. 이에 경기감사는 이들에게 최후 진술을 받고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조정은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이른바 '해읍정법(亥邑正法)' 판결을 내린다.

 고향 여주로 압송된 최창주와 이중배, 원경도는 1801년 4월 25일 많은 여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주관아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최창주의 나이 53살, 이중배의 나이 50살(추정), 원경도의 나이 28살이었다. 함께 잡혀간 정종호(세례명 미상, 1752~1801)와 임희영(세례명 미상, ?~1801) 또한 신앙을 지키다가 같은 날 여주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또 정순매는 같은 해 7월 3일 해읍정법 판결에 따라 여주에서 순교했으며, 이듬해인 1802년 1월 29일 여주에서 순교한 정순매의 오빠 정광수까지 포함하면 7명에 이른다. 이 밖에 하느님의 종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이종보(마르티노, ?~1801), 윤관수(안드레아, ?~1801)도 1801년 4월 25일에 같은 장소에서 피를 흘렸다. 1801년 말에는 완산 이씨 과부와 친척 1명도 처형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의술에 능했던 이중배는 감옥에 갇힌 동료 신자들과 수인들을 치료하자 신기하게도 기적이 나타나 고을 인근에서 환자들이 몰려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림=탁희성


   #여주본당, '여주 순교자 현양비' 세워

 이들이 피를 흘린 곳으로 전해지는 순교지 여주 관아 남문 밖은 이기경이 「벽위편(闢衛編)」에서 "여주 관아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에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들을 법률에 따라 참수했다"고 기록한 데서 비롯됐다. 여주본당은 2009년 6월 이들이 순교한 곳으로 추정되는 현장에 가로 150㎝에 세로 70㎝, 높이 220㎝ 크기 '여주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현재의 여주읍 홍문리 48-7 비각거리다. 최종철(스테파노) 여주대 교수가 화강석과 오석으로 죄수 목에 씌우던 칼 형상으로 제작했고, '순교자 찬가'와 여주 출신 순교자 20위 명단을 한글로 새겨 넣었다. 또 성당 경내에도 2004년 9월 순교자 현양비를 세워 여주 순교자들의 뜨거웠던 순교신심을 기리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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