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3) 이경언 바오로(1792-1827)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3) 이경언 바오로(1792-1827)

교우 격려ㆍ복음 전파가 '낙', 투철한 신앙으로 순교 열망

Home > 기획특집 >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
2012.04.15 발행 [1162호]
교우 격려ㆍ복음 전파가 '낙', 투철한 신앙으로 순교 열망


"…내 아들 딸아, 너희들이 철도 들기 전에 내 생명줄이 끊어지게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줄 덕도 없고 재산도 없으니 다만 몇 마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자 한다. 천주의 성은을 충실히 따르고 어머니께 효도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여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 세상에서 착한 길을 따르면 분명히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가벼운 잘못이라도 절대로 저지르지 말며,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선이라도 항상 힘써 행해야 한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쓸 말이 많으나 종이와 붓이 모자랄 뿐 아니라 또 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해 아랫도리를 쓸 수가 없고, 20근도 더 되는 큰 칼을 쓰고 있어 정신이 얼떨떨하고 팔이 떨린다. 그래서 더 글을 쓰지 못하겠다. 무엇보다도 특히 착하게 살고 착하게 죽기에 힘쓰기 바란다. 천만 번 부탁이다."

순교를 앞둔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이 옥에서 쓴 편지 일부다. 어린 자녀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다. 혹독한 고문으로 자신의 한 몸을 지탱하기 힘든 처지임에도 자식들에게 전하는 당부는 추상(秋霜)같다. 천주 성은(聖恩)을 따라 착하게 또 착하게 살라는 것이다. 초창기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묻고 순교의 가시관을 받았다.

 '종회'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이경언은 1792년 한양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충청도 연기군수를 지냈고,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외조부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초창기 한국교회에 기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누나다.

 이경언은 어려서부터 부모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실천했다. 몸은 허약했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로 지체 높던 가문은 몰락했고, 아주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신유박해 당시 겨우 10살이던 이경언은 홀어머니, 형수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23살 되던 해에 중인 집안 처녀와 혼인했다.

 이경언은 평소 속병이 있어 자주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화평한 얼굴로 지냈으며, 성경을 읽고 깊은 묵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기도와 묵상에 전념할 때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교우들 집을 방문해 교리를 전하는 것을 낙으로 삼던 그는 뛰어난 교리 지식과 변론으로 교우들을 깨우쳤고, 냉담교우를 만나면 정성을 다해 회두를 권고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불쌍한 이를 만나면 어떻게든 돕고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경언은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자기 잘못을 지적해준 형제에게 고마움을 전했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쳤다. 이런 심경은 현석문(가롤로)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우정은 보통의 우정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아니면 아무도 내 결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면 형은 참으로 나의 보물이었습니다."

 이경언은 교리 연구와 전도를 위한 모임인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로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또 북경을 왕래하는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북경 주교가 한국교회 지도자가 될 남녀 회장 몇 사람을 선발하라고 하자, 매달 첫째 주일에 자신의 집으로 회장 후보자들을 불러 모아 묵상 자료를 주면서 참된 신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이경언은 마음속으로 항상 순교를 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에 천주교를 퍼뜨리려면 우리가 주님 진리를 증거하는 피를 흘려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주를 위해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할 것을 권고하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경언이 나눠준 서적과 상본이 전주에서 적발됐다. 한양에 있던 이경언은 자신을 체포하러 올라온 전주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먼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신앙을 고백했고, 조정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됐다. 이경언은 혹독한 고문 중에도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던 열의를 옥중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아아, 나는 열심히 하지도 않고 체질도 약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특은으로 이 형틀 위에 놓여 있는 동안 구세주의 매 맞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매질할 때마다 나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20여 차례 매를 맞고 나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깨닫고, 나는 '천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경언은 수차례 혹독한 형벌로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는 형과 누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전주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서한에는 그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집에 올라오실 때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공번된 아버지에게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이경언은 끝까지 버텼지만 선천적으로 약했던 그의 몸은 고통을 견뎌내질 못했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고,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야 했다. 결국 1827년 6월 27일 전주 감옥에서 하느님께 영혼을 바쳤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이경언이 감옥에서 쓴 수기와 편지는 교회사의 소중한 자료로 전해진다. 그의 편지는 투철한 천주 신앙과 함께 순교를 열망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인정하오.(…)
 순교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순교자의 고통이 그리스도 수난과 유사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순교자의 자세가 그분의 자세, 즉 사랑을 닮았기 때문이오.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아니,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가겠다.' 이렇게 결심하니 기운이 솟아났소."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경언을 "조선교회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하나"라고, 그의 신앙고백을 "조선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찬미를 받아 마땅한 모범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  교우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인 이경언이 한 과부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 이경언이 혹독한 형벌과 굶주림으로 옥사한 전주 감옥 터.
▲ 이경언이 전주로 이송되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한양 포도청 터 표지석. 서울 광화문에 있다.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