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모든 유혹 이겨내 동정 지키고, 죽음으로 믿음도 지켜

모든 유혹 이겨내 동정 지키고, 죽음으로 믿음도 지켜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0)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Home > 기획특집 >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
2012.01.15 발행 [1150호]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0)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 평화방송TV는 2010년 9월 순교자성월을 맞아 특별기획 드라마 '동정부부-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을 제작했다. 사진은 드라마 한 장면.


동정(童貞) 부부.
 혼인을 하고서도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 부부를 일컫는 말이다.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런 부부가 한국교회사에 등장한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부부다.

 참으로 이상한 부부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한국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유중철과 이순이가 일찍이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은 그들이 특별히 별나서가 아니었다. 성경과 복음적 권고에 따른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초창기 신자들이 많이 읽던 「성경직해」와 「성경광익」, 「칠극」과 「천주성교일과」와 같은 교회서적들은 동정생활을 높이 평가했고, 이에 따라 동정생활은 하나의 신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될 수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와 수녀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박해시대였다. 혼기가 찬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천주교 신자로 의심을 받아 화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오매불망 하느님 일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이들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바로 동정 부부로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젊은 남녀가 동정을 지키며 부부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두 사람은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4년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육체적 유혹을 근 십여 차례 받아 하마터면 동정서약을 깰 뻔 했어요. 그 때마다 저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피를 흘리신 사랑에 의지하여 무사히 그 유혹을 이겨냈답니다.…"(이순이가 순교 직전 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처럼 육신의 욕망을 참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부부는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했다. 두 사람에게는 가정이 곧 수도원이었고, 순간순간이 유혹과 맞서 싸우는 수도생활이었다.


유중철(柳重哲)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덕망있는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종 125위에 포함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유문석(요한)이 그의 아버지와 동생이다. 두 사람도 유중철과 함께 1801년 순교했다.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유항검이 한국교회 설립 직후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다. 그는 가족과 친지에게 널리 교리를 전했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됐다.

 이런 환경 덕분에 유중철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랐다.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춘 그는 본분에 충실한 생활을 하면서 세속 모든 허영을 업신여긴 까닭에 젊은 나이임에도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중철은 16살이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했다. 그는 이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주 신부와 아버지에게 털어놓는다.

 이순이(李順伊)는 1782년 한양에서 아버지 이윤하(마태오)와 어머니 안동 권씨 슬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수광의 8대손, 외할머니는 성호 이익의 딸이다. 어머니는 권철신(암브로시오)ㆍ권일신의 누이동생이다. 이처럼 그의 본가와 외가는 천주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남인 집안이었다.

 이순이는 아버지가 세례를 받을 때 함께 영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179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어머니에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몸은 약했으나 신앙생활 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그는 13살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첫영성체를 했다.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딸의 선택이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긴 어머니는 기꺼이 승낙을 했고,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주 신부 머리에는 당연히 유중철이 떠올랐다.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도록 혼인을 맺어주기로 했다. 마침내 1797년 10월 두 사람의 혼사가 이뤄졌다. 겉으로는 부부지만 실제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한 혼사였다. 신랑은 열여덟, 신부는 열다섯 살이었다. 1년 동안 한양 친정에 있다가 이듬해 9월 초남 시댁으로 내려간 이순이는 어려서부터 꿈꿔오던 생활이 비로소 이뤄졌음을 유중철과 함께 기뻐하면서 이 은혜를 굳은 신심과 철저한 실천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유중철은 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전주 옥에 갇혔다. 동생 유문석이 집과 전주를 오가며 옥바라지를 했지만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어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 했다. 옥에 갇혀 있던 8개월 내내 목에 칼이 채워져 있었고, 그 칼은 죽어서야 비로소 벗을 수 있었다. 유중철은 그해 11월 4일 동생과 함께 전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유중철이 순교할 때 옥에 있던 이순이는 남편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는 것을 알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에서 자기 누이(즉 아내)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됐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중철이 잡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순이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됐다. 전주로 끌려간 그는 옥에 함께 갇힌 가족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권면했다. 이는 이순이가 옥에서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혔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순이는 죄수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유배형을 받자 "우리는 천주를 공경하니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저도 제 집안 식구들처럼 천주를 위해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했다. 관에서 이를 들어주지 않아 귀양길에 오른 이순이는 100여 리를 갔을 무렵, 갑자기 유배형이 취소됨에 따라 다시 전주로 돌아와 옥에 갇혔다. 이때 이순이는 "하마터면 치명(致命)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겠는가"라며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순교를 '더할 수 없는 은총'으로 굳게 믿은 이순이는 그해 12월 요서(妖書)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죽음을 자초한 셈이다.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간 이순이는 관례대로 망나니가 옷을 벗기려 하자 "내가 비록 네 손에 죽기는 한다마는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며 당당히 꾸짖고는 스스로 윗옷을 벗었다. 이어 편안한 모습으로 참수(斬首)되니, 그의 나이 갓 스무 살이었다.

 이순이 유해는 전주 제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됐다가 1914년 부활절에 유중철을 비롯한 가족 유해와 함께 전주 승암산으로 이장됐다. 이후 이 산은 치명자산(致命者山)으로 불리게 됐다. 동정 부부 묘가 있는 곳이 지금의 치명자산 성지다.

 전주교구는 신유박해 200돌을 맞은 2001년부터 매년 치명자산 성지에서 요안루갈다제를 열어 유중철과 이순이의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 유중철이 신유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혀가며 아내와 이별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 치명자산 성지에 있는 유중철ㆍ이순이 동정 부부의 묘. 묘는 부부를 비롯해 유중철의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작은 어머니 이육희, 동생 유문석, 사촌 유중성 등 일곱 순교자 유해를 합장한 것이다.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