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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15 - 사회에 첫발을 내딛다

[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15 - 사회에 첫발을 내딛다

대구에서의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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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발행 [997호]
대구에서의 새로운 삶


 1976년 봄 대구 모 양산업체 총무과에 입사했다. 장인이 목포의 딸을 찾아왔다가 우리가 어렵게 사는 것을 보시고 대구로 불러올린 것이다. 그 시절에는 맞벌이가 흔치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딸이 일하러 나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사위라는 사람이 두 아기를 돌보며 새 사육하는 것도 신통치 않았으리라.
 아무튼 새 직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해보는 직장생활인지라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가 비탈길에서 사고를 당해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78년 봄에는 공해관리기사시험에 응시했다.
 책을 놓은 지 오랜 30대 중반에 시험 준비를 한다는 건 모험이었다. 거기에는 연유가 있다. 그 무렵 냉동회사를 차린 아버지가 공해관리인을 업체에 반드시 둬야 한다는 공문을 받고 나에게 국가기술검정공단에서 주관하는 자격시험에 응시하라고 했다. 합격만 하면 아버지 일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시 공해관리협회에 등록하고 말 그대로 죽을 둥 살 둥 공부했다. 지금은 매연ㆍ수질ㆍ소음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때는 하나로 취합되어 과목이 많았다. 시험 장소는 부산에 있는 경남공전이었다.
 결과는 나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합격자 발표일에 협회 사무국장이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첫마디가 축하한다는 인사였다. 대구 응시자 420명 중 84명이 합격했으며, 합격자 중에 내가 톱이라는 것이다.
 
 공해관리인으로서의 1 년
 나는 합격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러나 당장 부를 것 같던 처음과 달리 차일피일 미뤄졌다. 하는 수 없이 대구에서 공해배출시설이 있는 직장을 물색한 끝에 모 염색회사의 공해관리인이 됐다. 이 회사는 두 번이나 배출시설 개선명령을 받은 업체였다. 첫날 현장 시설물을 둘러보니 형식적으로 만들어놓은 탱크 위로 폐수가 그대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양이 매일 200여 톤이나 됐다.
 나에게는 새로운 시설물을 직접 설계해 시공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참으로 난감했으나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에 대한 회사의 기대감도 크려니와 기사로서의 사명감이 앞섰다. 결국 2개월여 만에 집수조-중화조-침전조-여과조와 건조장으로 나뉘는 시설물을 만들어냈다.
 나는 정상가동을 하면서 마냥 뿌듯했다. 검붉은 폐수가 처리돼 맑은 물로 방류되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생겼다. 가동에 따른 약품비가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에 벅찼다. 어떤 간부는 남들처럼 비밀 파이프로 폐수를 빼내자고 했다. 나로선 회사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동조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품질관리 업무를 맡겼다. 그래서 품질관리교육을 받아 간부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생산현장의 품질관리에 착수했으나 갈등이 적지 않았다. 공해관리인은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구태여 품질관리를 맡기려면 또 한 사람의 공해관리인을 둬야 할 것 아닌가.
 그 무렵, 침전조에서 나온 슬럿지(찌꺼기)가 제때에 처리되지 않아 고민이었다. 매일 십여 부대씩 물컹물컹한 슬럿지를 담았다. 그 양이 산처럼 쌓였다. 그 때문에 몸이 녹초가 됐다. 나는 회사에 자동압축기를 요구했다. 전기로 슬럿지를 빵처럼 쪄내려는 발상이었다. 이것만 해결되면 품질관리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회사는 자동압축기 명목으로 은행융자를 받아 생산에 전용하자고 회유했다. 마지막 기대가 무너진 나는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박광호 (모세, 시인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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