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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11 - 고통 중에도 주님 일꾼으로

[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11 - 고통 중에도 주님 일꾼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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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2 발행 [992호]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 나날


 1970년 1월 목포에는 골롬반회 모 안토니오 신부님을 지도신부로 해서 가톨릭매스컴위원회가 발족했다. 다도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파를 통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함이었다. 시내 여러 본당에서 추천된 다섯 명의 신자들이 구성원이었다. 나는 경동본당을 대표해 참여했다.
 나에게는 제작ㆍ방송위원직이 주어졌다. 원고를 작성해 방송국에 가서 녹음하는 일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라디오 목포'(목포문화방송국 전신)가 있었는데, 우리 매스컴위원회에서 마련한 '마음의 안식처' 프로를 주일 아침마다 내보냈다.
 난 이 일을 기꺼이 수행했다. 솔직히 레지오 활동만으로도 힘겨웠으나 내가 할 일이 더 있어서 반가웠다. 이 같은 봉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는 생각으로 매주 내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 보냈다. 시간이 부족할 때는 새벽까지 통증에 몸부림치며 방송 원고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72년을 맞았다. 환부는 무려 아홉 군데가 됐고, 여기에서 흐르는 고름이 매일 범벅을 이뤘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딛기 어려워 지팡이를 짚어야만 보행이 가능했다. 나는 지저분한 환부를 닦아내면서 끈질기게 일상의 삶을 지탱해 갔다.
 정녕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나날이었다. 나에게 하느님이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하느님 당신께서 나의 고통을 어루만져주시고, 내가 맡고 있는 일들에 활력과 기쁨을 부어주셨던 것이다.
 그 무렵에는 나름대로 확고하게 신앙의 기틀이 놓였다. 하느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때부터 나와 함께하신다고 믿었다. 내가 태어난 지 한 해 만에 관절염을 앓고 그 후 오늘에 이르도록 숱한 고통과 눈물을 흘린 일들 모두 하느님 안에서 이뤄졌다고 믿었다. 나에게 신앙과 문학을 주시고 레지오 단원으로서, 혹은 가톨릭 매스컴 위원으로서 당신 영광을 위해 살게 해주신다고 굳게 믿었다.

 성모의 밤 행사 때 약속
 그 해 3월에 김종남(로마노) 신부님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왔다. 김 신부님은 미사 강론을 통해 신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사제관 처마 밑에서 눈비바람 맞으며 계시는 성모님이 초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성모님께 어찌 공경의 절을 올릴 수 있으며 전구를 청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면서, 성모님을 제대로 모실 수 있는 성모동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전폭적 지원 아래 성모동산 공사를 곧 착수했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불길처럼 일어나면서 성금을 내는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노동으로 대신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5월 중순경, 김민수(디모테오) 보좌신부님이 내 집을 방문했다. 성모동산 축복식과 성모의 밤 행사를 성모성월 마지막 날 동시에 할 예정인데, 그날 축시를 낭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망설임 없이 쾌히 수락했다. 신앙인으로서 이보다 큰 영광이 없었다.
 그런데 성모의 밤은 6월 10일에야 거행됐다. 성모동산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진 것이다. 이날 나는 축시 '당신 마음 안에 살게 하소서'를 낭송했다. 우리들이 성모님께 의탁해 복음을 전하며 성모님을 본받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과 기원을 담은 시였다.
 주임신부님은 신자들에게 성모님께 마음의 예물을 바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적어낸 종이들을 일일이 태워 봉헌했다. 그때 내가 적어낸 예물은 일 년 동안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겠다는 약속이었다. 나의 난치병이 치유되는 은총의 묵주기도를 바치게 된 것이다.

 박광호 (모세, 시인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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