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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해] (8)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의 해] (8)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가택 연금 중에도 거침없이 하느님 말씀 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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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4 발행 [983호]
가택 연금 중에도 거침없이 하느님 말씀 설파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이 허리띠의 임자(바오로)를 이렇게 결박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넘길 것이다"(사도 21,11).

 예루살렘으로 가던 바오로가 지중해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자 하가보스라는 예언자가 성령의 이같은 말씀을 전하며 길을 막아섰다. 그러자 바오로 일행도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 되니 여기서 발길을 돌리자"고 애원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했다. 하지만 바오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왜 그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 로마로 끌려온 바오로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사도 28,31) 로마 성바오로대성전 프레스코화
 

# 쇠사슬에 묶인 사도 바오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뒤 스페인에 가서 선교하고 싶었다. 또 일전에 베드로와 합의(예루살렘 사도회의)한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금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돈도 전해줘야 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느 누구도 바오로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적대시하는 그곳 민심을 주님의 아우 야고보를 통해 들어야 했다.

 "바오로 형제,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신자가 된 이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을 열성으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모세를 배신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식들에게 할례를 베풀지도 말고 우리 관습을 따르지도 말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유로운 바오로의 복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야고보는 유다인 이웃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다인 남성 신자들과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하고 그 비용을 대라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바오로는 율법을 어지럽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바오로가 비유다인(그리스인)을 성전 안뜰에 데리고 들어왔다"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유다인의 성전 출입은 사형에도 처할 수 있는 금기사항이었다. 흥분한 유다인들이 바오로에게 매질을 하자 예루살렘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결국 로마군이 출동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에게 폭동 선동, 성전모독, 나자렛 분파의 괴수 등 여러 가지 죄목을 붙였다. 바오로는 재판권을 가진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카이사리아로 이송됐다.

 이때부터 바오로는 로마 총독 펠릭스, 총독 페스투스와 왕 아그리파스 2세, 그리고 그의 과부 누이 베르니게 앞에서 열정에 찬 목소리로 증언과 연설을 했다. 이로써 약 24년 전 바오로가 회심한 직후 하나니아스가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이 그대로 이뤄졌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7).
▲ 로마를 향한 바오로의 여정

 바오로는 무려 두 해가 넘도록 재판다운 재판을 받지 못한 채 미결수로 남아 있었다. 그에게 형을 부과할만한 죄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총독은 유다인들 눈이 무서워 바오로를 풀어 주지도 못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기로 하느님께 맹세했다"(사도 23,14)며 살기(殺氣)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굶주린 늑대처럼 바오로를 공격했다.

 바오로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유다인 대사제가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자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라고 되받아쳤다. 그토록 오래 수감생활을 했으면 심신이 상당히 쇠약해졌을 텐데 신념만큼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바오로는 총독 페스투스가 유다인들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재판을 하려고 하자 로마 황제 법정에 상소했다.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그럴 권리가 있었다.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을 밝히고 로마 법정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
#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바오로 이송은 지중해변 카이사리아에서 배편으로 이뤄졌다. 여객선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다른 흉악범들처럼 족쇄와 쇠사슬에 묶인 채 화물선 한 구석에 쳐박혀 갔을 것이다. 로마는 바오로가 하루 빨리 달려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자 열망했던 제국의 심장부다.

 시돈→리키아의 미라→크레타섬→몰타→푸테올리를 거치는 기나긴 이송과정은 사도행전 27장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바오로가 태풍을 예견했는가 하면 손에 달라붙은 독사를 물리치고, 좌초한 섬에서는 열병 환자를 고쳐주는 등 영웅담을 연상케하는 사건이 열거돼 있다.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기존의 어느 흥미로운 항해 또는 파선 기록을 토대로 이송과정을 재구성했을 것이라는 게 성서주석가들 견해다.

 사도행전은 사도의 최후 모습을 전해주지 않는다. 로마에 도착한 뒤 가택연금 상태에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설파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루카가 최후 순간을 생략한 이유는 유죄판결과 처형 대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로마 수감생활 중에 쓴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보면, 순교의 칼을 기다리는 심정을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 1 20-23).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바오로의 최후는?
  바오로의 로마 가택연금 시기는 61~63년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교는 고대전승(클레멘트의 첫째 서간, 바오로의 묵시행전 등) 자료에 의존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네로 황제가 로마 방화를 빌미로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64~68년) 남문 밖 교외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그 근처에 있는 현 성바오로대성전 자리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의 목이 땅에 떨어져 3번 튀었는데, 그 지점에서 솟아나는 샘이 오늘의 트레 폰타네(Tre Fon-tane)다.

 64년 발생한 대화재는 엿새 동안 로마의 절반을 태워버린 큰 사건이다. 당대 역사가 타키투스는 방화 주범은 네로 황제였으나, 네로는 시민들 원성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혐의를 씌워 엄청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교회 책임자였던 베드로도 거의 같은 시기(67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사도 바오로의 생애' 연재가 이번 호로 끝납니다. 이어지는 '서간을 통해 본 바오로의 사상과 신학' 편에도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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