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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베다니아의 집' 외국인 노동자의 기다림

<중>'베다니아의 집' 외국인 노동자의 기다림

"아름다운 한국 땅에서 마음 놓고 일하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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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5 발행 [703호]
"아름다운 한국 땅에서 마음 놓고 일하며 살고 싶어요"


▲ 서울 보문동에 위치한 외국인 노동자의 쉼터 ‘베다니아의 집’에 모인 필리핀 여성들이 정순옥 수녀, 마리아(왼쪽 세번째부터) 수녀와 함께‘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듯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노동사목회관 뒷편 골목. 허름한 연립 주택 입구에 ‘베다니아의 집’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건물의 반지하와 1층을 사용하는 이 집은 3D(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의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지난 96년 서울대교구가 마련한 쉼터다.

영하의 칼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날, 베다니아의 집에는 6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은 한국 땅에서 꿈을 이루기도 전에 다치거나 병들어 힘겨워 하는 쉼터 식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삶 속에 배어 있는 진솔한 얘기를 서로 털어놓았다. 가슴 속 깊이 감춰둔 상처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도 했고, 때론 상처 속에서도 꿈틀대며 살아 있는 희망도 드러냈다. 그 희망은 마치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을 넘치게 할 구세주를 고대하는 기다림과 다르지 않았다.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감사로

한국에 온 지 1년6개월 남짓한 아이다(41, 안나)씨. 쉼터의 다른 식구들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듯했다. 미군 캠프에서 미군 자녀를 돌보는 허드렛일을 하던 그녀는 지난 5월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고, 수술을 받은 후 오갈 데가 없어 베다니아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일이 힘들어도 희망은 늘 있었죠. 필리핀에 남겨둔 남편, 3명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냈는데, 발병 사실을 알고 나서는 모든 게 무너졌어요. 차마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못했어요….”

병원 측은 ‘가히 희망적이지 않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희망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나 베다니아의 집에서 지낼 수 있으니 감사할 일 아니겠어요? 물론 아직도 삶이 힘겹지만 제2의 생명을 얻은 기분입니다. 전 이번 대림시기에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받은 만큼 남에게 베풀며 살겠다’고요.”

아이다씨의 이야기를 듣던 조이(34)씨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말문을 열었다.

“아이다 언니와는 다르지만 전 이국 땅에 죽어가는 남편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못쓰는 폐가죽을 재가공하는 공장에서 일하다 지난해 10월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수발하기 위해 1년전 입국한 그녀에게 한국은 ‘남편을 죽이는 몹쓸 땅’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희망을 갈구한다’고 고백한다.

“만약에 남편이 지난해 죽었다면 어쩌겠어요. 식물인간이지만 그래도 살아있고, 얼마 전에는 필리핀에 있던 애들도 3개월간 한국에 와서 가족이 함께 병원에서 오붓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죠. 전 한국에서 두 번째 성탄절을 맞게 될텐데, 이번에도 지난 성탄 때처럼 남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겁니다.”

한국 체류 기간이 가장 길어 ‘왕언니’로 불리는 린다(51)씨가 국내 33만 9000여명의 이주노동자를 대변하듯 말을 꺼냈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일한 경험에 비춰볼 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노동허가제도가 실시되지 않으면 더 이상의 희망은 없습니다. 불법으로 남든지 아니면 강제출국 당하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이주노동자의 인권 상황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근본부터 바로잡기 위해서는 노동허가제 도입이 최선책입니다.”

2년 전 입국해 현재 플라스틱 제조 중소기업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는 레아(30)씨도 “불법체류라는 딱지가 무서워 바깥 출입도 마음대로 못한다”고 털어놓는다. “늘 불안해요. 한국은 아름다운 곳인데, 아름다운 이 땅에서 맘놓고 일하며 살고 싶어요.”

▨또 다른 희망

지난 90년 우연히 만난 스리랑카 노동자의 고민을 들어준 것이 계기가 돼 12년째 이주노동자 사목에 투신하고 있는 서울대교구 외국인노동자상담소장 정순옥(프라도 수녀회) 수녀의 희망은 또 다르다.

“기업주들이 말도 안 되는 트집으로 마땅히 주어야 할 임금을 체불하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정부도 좀 솔직해지면 좋겠습니다. 속으로는 3D업종에 외국인력이 필요하면서 겉으로는 노동허가제를 도입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만 배출하는 연수생제를 고집하니…. 저는 12년을 기다려왔습니다. 노동허가제 도입을. 이 희망이 이룰 수 없는 희망이 아니면 좋겠어요. 제가 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상담소나 외국인들을 위한 쉼터 베다니아의 집 같은 시설이 없어지고 이 땅의 주님의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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