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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르포-태풍 상처 아물리는 거제도 예구마을

새해르포-태풍 상처 아물리는 거제도 예구마을

그날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신앙만은 잃지 않았기에 오늘은 내일의 희망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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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4 발행 [755호]
그날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신앙만은 잃지 않았기에 오늘은 내일의 희망가를 부른다


▲ 1. 예구마을 선착장의 아름다운 해질녘 풍경. 조업을 마친 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는 선착장에는 태풍이 남긴 생채기보다 진한 희망이 배 있다.2. 새우잡이를 마치고 돌아와 밧줄을 힘차게 당기며 배를 선착장에 대고 있는 김치환(왼쪽)씨의 모습에서 삶의 애착과 희망이 샘솟는다. 3. 태풍에 휩쓸린 집 터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 양선애씨. 4. 예구마을의 복원을 기원하며 박미악 할머니가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경남 거제도 장승포를 지나 20여분 남쪽으로 더 내려간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잡은 예구마을. 행정구역상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에 속하는 이 마을은 순교자 윤봉문(요셉)의 형 경문(베드로)이 108년 전 박해를 피해 살며 거제도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이후 지금껏 신앙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전형적 교우촌이다.

 넉넉하진 않지만 따뜻한 사람과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어촌 마을 '예구'. 하지만 지난해 9월 한국에 상륙한 태풍 '매미'는 교우촌 전체를 순식간에 날려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평화신문 2003년 9월21일자 참조). 대부분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하거나 고기잡이로 연명하던 신자들은 가옥 전체가 파손되는 피해를 본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이던 양식장과 어선 모두를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매미'에 갈갈이 찢겨졌던 예구마을을 새해를 맞아 다시 찾았다.희망마저 사라진 듯했던 마을에는 새로운 삶의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슴 속 생채기를 서로 쓰다듬으며 삶의 터전을 새롭게 일구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희망과 꿈을 만나보았다.
 
 ■희망 1

 김치환(바오로, 48, 예구공소 회장)씨는 '매미'가 불어닥치던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후들거린다. 새우와 멸치를 말리던 작업장과 냉동창고 전체(싯가 1억원)를 흔적도 없이 잃었으니 살길이 막막했다.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 짓던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망부석처럼 있을 수만 없었다.

 그간 진 빚도 많지만 여기저기서 자금을 융통해 부숴진 배를 수리한 김씨는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새벽 5시만 되면 바다로 나간다. 하루종일 파도와 싸우며 힘겨운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오후 4시께는 온 몸이 파김치가 되지만 새우를 내다 팔 생각에 힘이 솟는다.

 30년 경력의 어부지만 늘 만선의 기쁨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출어 때마다 70~80㎏은 잡아야 빚이라도 조금 갚을 수 있지만 20㎏도 못잡을 때가 허다하다. 매서운 겨울 바람과 높은 파고가 조업을 방해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씨는 절망하지 않는다.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힘겹고 고단한 삶이지만 하느님은 분명 내일 또 저를 살게 하실 것이라는 신앙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매일 떠오르는 해처럼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고 믿고, 또 힘을 내어야죠."

 뱃머리에 앉아 갓 잡은 새우를 손질하던 김씨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희망 2

 예구마을에는 현재 아홉 가구가 콘테이너에 살고 있다. 태풍에 쓸려간 집을 대신해 시에서 급하게 마련해 준 것이다. 이들 틈에 끼여 사는 양선애(율리안나, 43)씨. 태풍에 가옥은 물론 남편 박영춘(도미니코, 46)씨와 함께 피땀으로 일궈오던 가두리 양식장 모두를 잃었다. 그간 융자받은 2억여원을 갚기 위해 자식처럼 키워온 7만 마리의 고기를 잃고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넋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아버지, 자녀들과 헤어져 남편과 찬바람 가시지 않는 콘테이너에 머물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키우고 있다. 그녀의 희망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이 함께 지낼 새 집을 짓는 것. 남편은 틈틈이 낚시꾼들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 밥벌이를 하고, 부인 양씨는 무너진 집터에 다시 콘크리트를 쌓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예전처럼 단층집을 지으려고 하지만 자치단체는 또 다른 태풍 피해를 우려해 1층은 기둥만 남겨놓은 채 그 위에 2층 집을 지으라고 요구한다. 유사시 물이 들고 날 수 있기 위한 조치로, 이를 어기면 준공허가가 불가능하단다. 하지만 지원금은 고작 450만원뿐. 양씨는 "자치단체 요구대로라면 1억3000여만원이 드는데 얼토당토않은 요구"라고 하소연한다.

 태풍이 남긴 생채기에 지자체가 또 다른 가슴 속 상처마저 안겼지만 양씨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 짓는 집을 담보로 빚을 내 울며 겨자 먹기로 공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2월이면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겠지요."

 
 ■희망 3

 콘테이너는커녕 방 한칸 없어 예구공소 건물 한켠 작은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박미악(로사, 72) 할머니. 태풍에 휩쓸려 기둥만 남은 집 터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던 할머니를 위해 신자들이 마련해 준 공간이다.

 할머니는 3개월 전 태풍이 밀려들던 때를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를 친다.

 "아이고, 안 죽고 살아 있는 것이 하느님 은총이지…."

 시에서 콘테이너를 마련해 주었지만 공간이 좁아 아들 내외 부부와 손주들에게 양보하고 공소 뒷방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갈 방법이 있다'며 여유 아닌 여유를 보인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신앙은 잃지 않았잖아.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며 용기를 내면 살아갈 힘과 지혜가 생기는 법이지."

 요즘 할머니 손에는 늘 묵주가 쥐어져 있다. 공소 뒷방에서 성모상을 작은 식탁에 모신 채 촛불을 켜고, 매일 50단 이상을 바친단다.

 "예구마을은 작지만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야. 사람들도 넉넉하고…. 하루 빨리 마을이 복원되어 예전처럼 가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어. 성모님이 묵주기도 속에 담긴 내 소망을 들어주실 거라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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