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인터뷰-김성수] 유랑공연 70년, 국민MC 송해가 남긴 것

[Pick 인터뷰-김성수] 유랑공연 70년, 국민MC 송해가 남긴 것

Home > NEWS > 사회
입력 : 2022-06-10 18:41 수정 : 2022-06-10 18:43


○ 방송 :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오창익의 뉴스공감>

○ 진행 : 노정렬 앵커

○ 출연 : 김성수 문화평론가


금요일의 픽으로 모시겠습니다.


▷김성수 문화평론가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오늘 6.10항쟁 일어난 지 35주년 되는 날인데 젊은 세대 분들에게는 벌써 35년 전의 일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해 태어난 분들은 35세라는 말인데 김성수 문화평론가께서 짚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 바로 엊그제 이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제가 1986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난생 처음 세상이 내가 알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라는 증거들을 보게 되거든요. 그중의 하나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디오를 봤을 때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정점에 서 있던 때가 87년도였던 것 같아요. 87년은 그해 2월부터 시끄러웠거든요. 1월에 박종철 군이 사망했잖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고문치사사건으로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한 학생이 죽었다는 정도로 알려졌죠. 집요하게 사건들을 특히 당시 재야의 인사들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이 파헤쳤고 거기에는 기자들의 힘도 꽤 컸습니다. 그러면서 2월 이후 하나씩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잘 묻어놨는데 그러면서 전반적으로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하겠다는, 그런 간선제 선거를 직선제로 바꿔야겠다는 야당들의 서명운동과 서명운동에 호응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학기 초에 있었고 그러다가 4.13호헌조치가 떨어집니다. 헌법을 수호한다는 선언을 전두환 대통령이 하죠.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했습니다.

6.10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수업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고 시험은 거부했고요. 대학교 2학년 때 후배들 데리고 가두시위 나가서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들어오는 날 많았고 그때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던 표정들이 선한데 그때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지는데 바로 6월 9일 저는 서강대생이었는데 옆에 연대에서 한 학생이 최루탄에 맞았다는 거죠.

그 최루탄 직격탄에 맞았다고 할 때 학생 운동을 하던 저와 같은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던 게 저도 사실 4.13 호헌조치 있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직격탄을 맞은 적 있는데 저는 구사일생으로 잘 피했던 거죠. 그 친구가 아니면 제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그런 상황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더 절실했고 모두가 이한열의 선배이자 동료이자 부모이자 친인척이 된 것처럼 걱정을 했었고요.


▷주역이 따로 있었고 언론과 종교의 역할도 컸지만 결국에는 당시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화이트 컬러, 블루컬러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이 동참했기에 전국적인 도화선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한열의 죽음이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었나. 이한열의 죽음이 이후 화이트 컬러들이, 점점 더 그 전까지 이분들이 시위를 하고 있으면 위에서 응원해 주고 휴지 던져주고 그리고 학생들이 도망가면 숨겨주는 정도였는데 이한열 씨가 죽었다는 얘기가 대서특필 되고 난 다음에는 직접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는 광화문이 화이트컬러의 물결로 꽉 차기도 했죠.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젊은 분들의 희생이 기폭제가 됐습니다. 언론과 천주교의 역할도 꽤 컸습니다.

▶일단 명동성당이 저한테는 피난처였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그랬을 거예요. 가두시위를 하다가 잡힐 것 같으면 명동성당으로 가라. 명동성당에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고 그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을 잡아가지 못하게 맨 앞에서 막아주셨던 분이셨죠. 그때는 모두가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심장부에서 학생들과 여러 시위자들을 품어주는 역할을 명동성당이 했고 그대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줬기 때문에 그 힘은 컸다고 볼 수 있겠죠.


▷문화평론가시라 문화 쪽으로 포커스를 옮겨 보면 6.10항쟁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가 화제작 ‘1987’이라고 하는데 2016년 기획됐고 이 영화가 제대로 개봉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분들 많았다고요.

▶2016년은 아직까지 박근혜 정권 시절이었죠. 기획안만 가져갔을 때 보고 퇴짜를 놓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오히려 감독을 걱정해 주는 일들이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급속도로 일이 전개됐던 것에는 촛불항쟁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기획안이 급물살을 탔어요.

그래서 순식간에 만들어졌어요. 2017년에 개봉을 하게 됐는데 저는 이 영화 개봉하고 하루, 이틀 만에 가서 봤는데 처음에는 보는 내내 제대로 볼 수 없었어요. 계속 우느라고. 지금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인데 그런데 다시 총 3번 이 영화를 봤던 거로 기억하는데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1987년 당시 우리 국민들이 어떤 염원을 가졌고 특히 학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역사의 현장에 나왔는지. 거기 안에 제가 고민했던 것들이 그 안의 주인공들이 고민했던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재미난 것은 6.10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나이가 먹어서 배우가 돼서 많이 나왔거든요. 악역을 했던 경찰 간부 역할을 했던 우현 씨 같은 경우는 그분이 바로 이한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었죠.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더욱더 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줘서 n차 관람이 잇따랐던 영화가 아닌가.


▷6.10항쟁과 관련해서 어떤 문화 콘텐츠를 평론가로서 추천해 주실까요? 젊은 후배 세대들에게 추천해 주신다면요.

▶기본적으로 1987이라는 영화는 중요한 작품이 되고 그 외에 저는 오히려 지금 영화관에 걸려 있는 ‘그대가 조국’이라는 작품을 여러분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대가 조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왜 권해 드리냐면 1987년대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거든요. 요즘에 저는 그런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를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비교해 보면서 지금과 그때를 한 번 조각 맞추기 식으로 맞춰보시면 아마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그런 지혜로운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인의 성함도 조국이지만 우리가 나의 조국, 조국이 서려면 청년이 서야 한다는 학생시절의 필독서도 있었고 20, 30대 후배 분들이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화평론가 김성수의 강추고요. 엊그제 국민MC 송해 선생님의 별세 소식이 있었습니다. 전에 전국노래자랑 녹화를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졌고요. 후임 MC를 물색 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분이 전국노래자랑의 MC를 처음 맡았을 때가 아마 만으로 62살 정도였을 거예요. 60이 넘어서 하셨는데 그 상태에서 과연 몇 년을 할 수 있을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차기 MC를 염두에 둘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건강하시니까 그런 얘기는 못하고 그런데 34년을 하셨습니다. 기네스 기록에 올라 간 것은 최고령자 현역MC라는 형태로 올라가 있는데요. 34년 동안 한 건 기네스에 안 올라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 다시없을 거예요. 공영 방송 시스템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한 프로그램이 34년을 할 수도 없어요. 그런 측면에서 영원히 깰 수 없는 기록이고 34년을 줄기차게 했다는 거예요. 건강관리를 잘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넘겨주지 않았다는 게.


▷그래서 비결이 온 몸에 꿀 바르고 벌 장식한 사람도 있고 에피소드 많잖아요. 송해 선생님이 대중교통도 이용하시고 사우나 가서 목욕하시고 그 지역 특산물이나 몸에 좋은 걸 그렇게 잘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건강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면 처음에 얘기하시는 것은 자신이 늘 걸어 다니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특히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방송을 해서 건강이 좋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늘 술로 청소를 하잖아. 소독을 하잖아.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유명하죠. 일요일 낮에 밥을 먹든 안 먹든 점심 드시면서 늘 켜놓는 전국 노래자랑. 진짜 우리 귀에 누구나 다 따라하는 일종의 전원일기 앞에 나오는 음악처럼 귀에 익은 정도인데 여러 MC의 장점이 있겠지만 국민MC라는 칭호를 듣고 많은 분들이 부담 없이 친근하게 다가갔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첫 번째가 그분 스스로가 서민적인 분이었고 서민으로 살아왔거든요. 어떤 분들은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셨으니까 재산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분은 진짜 아끼고 알뜰하고 그러면서 늘 서민으로 사셨던 분이니까 그게 친근감 있었던 것 같고 이분이 기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가 이미 예순이 넘어 있는 상황인데 할아버지란 말이죠. 이 할아버지라고 하는 점이 가져다주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어리광을 피울 수 있고. 그때 34년 전에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할아버지였고요. 요즘에는 환갑이 청춘이죠.

그래서 늘 경계를 하지 않고 뭔가 친근하게 가서 장난을 쳐도 될 것 같은 그래도 늘 웃어주시고 했어요. 이분이 대단한 게 주변에서 툭툭 연예인이기 때문에 가서 알은 채 하고 말을 걸고 그러면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주고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분들도 많았고 그런 분들을 기억하셨다가 나중에 반겨주시고 환대해주시니까 그런 것들이 요즘에 한 드라마에서 추앙하고 환대라는 게 강조됐는데 송해 선생님은 환대해 줄줄 아는 사람이다. 누구를 환대해주면 받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인간적인 면면이 많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저도 고 이주일 선생님 인터뷰도 했고 송해 선생님도 뵙는 데 두 분의 공통점이 국민 코미디언이고 국민MC셨는데 인간으로서 겪는 가장 큰 슬픔, 아픔과 고통, 충격이 자기보다 먼저 자식을 앞세우는 건데 이주일 선생님도 그렇고 송해 선생님도 교통사고로 아들들이 먼저 갔어요.

▶그런 상처가 있기 때문에 상처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했거든요. 우리 가톨릭에서도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치유를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이분들이 힐링이 되는 프로그램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많은 상처를 겪었고 송해 선생님이 황해도 재령 무대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마다 눈물이 났거든요. 이분이 실제로 북에 가서 행사를 하기도 했었죠. 전국노래자랑, 북한MC와 촬영을 하기도 했는데 자기가 가고 싶은 고향에는 못 갔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평생소원이라고 하셨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던 것. 우리 모두가 이뤄드리지 못하게 됐던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추서와 훈장이 있는데 정부에서 송해 선생님께 한국 대중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희극인에게 추서가 되는 것은 최초라고요.

▶저는 이게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송해 선생은 1955년에 데뷔를 하셨어요. 전쟁 이후에. 1955년에 데뷔하시고 지금까지 희극 한 길만 가셨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활동하셨던 기간들이 너무나 힘든 질곡들을 우리나라가 넘어가던 순간들이었는데 그 아픔들 속에서 늘 우리 곁에서 웃음을 주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야 이런 희극인한테 금관문화훈장이 갔던 거는 그만큼 희극인들을 천대했다는 거죠.


▷현역 의원도 역임하신 고 정주일 본명은. 이주일 선생님께도 금관문화훈장은 추서가 안 됐거든요.

▶웃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동안 한국에서 평가절하 돼 있었다고 보고 전반적으로 대중문화인들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굉장히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있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웃음을 주는 사람들에 대한 재평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위상이 경제도 세계 톱텐이지만 K문화, K컬처가 K드라마, 오징어게임, 기생충, 국제영화제에서 배우들과 감독들이 수상을 하고 BTS와 블랙핑크는 전 세계인구들이 다 알고 있는데 말씀하신 대한민국 한국전쟁 이후 그 어려운 현대사를 다 견디면서 국민을 웃고 울게 만든 대중문화예술인들의 공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노정렬 MC께서도 대중문화예술인으로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그런 분들이 소중하다는 걸 좀 더 깨달아야 하거든요. 이분들의 삶의 역정 속에서 우리가 함께 성장해 왔고 우리가 함께 그 모든 역경을 이겨왔던 거고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게끔 해주고 위로해 줬던 사람입니다.
더 오랫동안 기억을 했으면 좋겠고요. 여러 가지 업적들을 새롭게 재평가해보는 시간들도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10항쟁 35주년 기념 맞아 문화평론가 김성수와 함께하고 있는데 본인이 대학교 2학년 때 거리에 최루탄을 직접 맞아가며 헌신을 했던 역사가 담긴 소중한 말씀 잘 들었고 저는 김성수 평론가 볼 때마다 늘 성수기를 구가, 늘 전성기.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cpbc 오창익의 뉴스공감 (vigorousact@gmail.com) | 입력 : 2022-06-10 18:41 수정 : 2022-06-10 18:43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pbc 가톨릭평화방송 <오창익의 뉴스공감>'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pbc 가톨릭평화방송'에 있습니다.
ⓒ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