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뉴스

6/10(수) - <1> 6·10 민주항쟁, 엿새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

재생 시간 : 03:49|2020-06-10|VIEW : 245

6·10 민주항쟁, 엿새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33년 전 오늘, 명동성당 일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모든 국민이 항쟁에 참여했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죠.33주년을 맞은 6·10 민주항쟁의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1> 6·10 민주항쟁, 엿새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

33년 전 오늘, 명동성당 일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항쟁에 참여했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죠.
33주년을 맞은 6·10 민주항쟁의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던 1987년 1월.
서울대생 21살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허위 발표를 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 1987년 1월 26일,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 회복 미사>
"이 정권의 뿌리에는 과연 양심과 도덕이 있는지 아니면 이 정권의 뿌리에는 총칼이 있을 뿐인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전두환 / 1987년 4·13 호헌 조치>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결국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군 사망의 진실을 폭로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밤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경찰은 명동성당을 향해 최루탄까지 쐈습니다.

<김병도 몬시뇰 / 1987년 6월 11일, 당시 명동성당 주임>
"내가 신신당부했잖아. 성당에 쏘지 말라고. 그럼 이건 뭐야, 우리하고 싸우겠다는 거야?"

이후 가톨릭교회는 중재에 나섰고, 시위대는 6월 12일 오전 바리게이트를 치웠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강제진압을 검토했고, 김수환 추기경이 다시 나섰습니다.

<함세웅 신부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김수환 추기경님이 아주 강하게 안 된다, 다시 광주와 같은 비극이 성당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 여러분들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좋다. 내가 가서 눕겠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그럼 내 옆의 뒷자리에는 사제들이 또 있을 거다. 사제들을 밟아라.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다. 수도자들, 수녀님들을 밟고 지나가라. 그 뒤에 청년 신학생들이 있을 거다. 그렇게 하려면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농성은 계속됐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교회의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세 번의 투표가 진행됐고, 6월 15일 시위대는 농성을 끝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리적 충돌도, 강제 진압도 없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이뤄진 결정입니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핵심으로 한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국민의 승리이자,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을 품어안고 평화적 해결을 이끌어낸 천주교회.
오늘날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