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순수녀의 시편 묵상

제34강 시편 49 편 인생의 수수께끼

재생 시간 : 08:36|2013-03-04|VIEW : 2,767

"정녕 그는 본다, 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함께 사라짐을, 그들의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로!"                      ...

"정녕 그는 본다, 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함께 사라짐을,
그들의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로!"
                          시편 49편 11절

 시편 49편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고 인생무상을 주제로 하는 대표적인 지혜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서 지혜‧슬기‧잠언‧수수께끼(4-5절)와 같은 지혜 용어뿐 아니라, 가르침의 대상이 ‘모든 백성’이고(2-3절),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11절), 지각없는 사람을 짐승에 비유하는(13.21절) 점은 지혜 시편의 요소입니다.

이 시편은 사람들에게 지혜와 슬기를 가르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혜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잠언’을 경청하고 묵상하는 데에서 얻어집니다. 그 잠언은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13.21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특히 인간의 부와 권세의 배경을 지닌 죽음입니다. 재물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나 자기 잘 난 맛으로 사는 사람도 모두 죽고 말기 때문에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한 사람도 귀한 사람도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다 함께 들어라.(3절)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를 초대합니다(2절). 여기에서는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 곧 천한 사람과 귀한 사람,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모두 부르고 있습니다. “천한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에 대한 총칭이고, “귀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유력하고 저명한 사람으로 왕족이나 귀족을 가리킵니다(시편 4,4). “부유한 자”를 부르는 이유는 그도 재물의 한계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르는 것은 그가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어라”는 말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지혜, 곧 보편적인 인간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녕 그는 본다, 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함께 사라짐을, 그들의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로!(11절)

이 구절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 ‘누구나’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보편적인 지식은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듭니다. 죽음으로 모든 구별이 없어집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인생의 진리를 깨친 자들이 죽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교사들이 지혜 있는 사람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이들”과 “어리석은 자들”은 종종 평행을 이룹니다(잠언 3,35). 지혜문학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지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주님의 뜻과 계시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혜롭지 못한 자들로 주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믿고 재물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7절). 시인은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재산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며 ‘남들에게’ 그것을 주고 맙니다(루카 12,20).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13절)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가 영화를 지니는 사람으로 보이므로 부자나 권세를 지닌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오래 가지 못한다.”를 직역하면 ‘하루 밤을 새우지 못한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하루 밤 자고 가는 것같이 짧게 살다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지만 부자라고 해서 영원히 살 것도 아닙니다. 두 부류 모두 짧은 생을 살다가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죽음 앞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얻으려고 골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16절)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현재의 고통이나 때이른 죽음에서 건지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2사무 4,9).

“저승의 손에서 나를 빼내시리라”에서 “빼내다”는 동사는 창세기에서 에녹에게 적용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녹을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눈앞에 당면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저승의 손”은 죽음에 대한 의인화입니다. “손”은 권세를 뜻합니다.

 시편 49편의 시인은 지혜의 스승으로서 스스로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깨우치도록 가르쳐줍니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부자라 해도 생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재물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운명이 재물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운명과는 다르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죽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믿음 속에 삽니다. 그는 믿음으로써 죽음으로부터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이 시편은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