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순수녀의 시편 묵상

제25강 시편 137편 시온 생각에 흘리는 눈물

재생 시간 : 08:13|2013-02-01|VIEW : 3,294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1절) 시편 137편은 시온의 노래에 속합니다. 이 시편 안에는 탄원과 저주의 요소가 함께 나타납니다. 용광로 같이 타오르는 증오심과 적개심이 이 시편 안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와 같은 증오심은 시인들이 당한 잔인함과 불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시편에는 파괴된 예루살렘의...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1절)

시편 137편은 시온의 노래에 속합니다. 이 시편 안에는 탄원과 저주의 요소가 함께 나타납니다. 용광로 같이 타오르는 증오심과 적개심이 이 시편 안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와 같은 증오심은 시인들이 당한 잔인함과 불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시편에는 파괴된 예루살렘의 슬픈 시절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고통과 비애감이 담겨있습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바빌론에 대한 저항과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노래합니다.

시편 137편은 역사적 배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 당하여 포로 생활을 한 과거를 회상하며 바빌론과 에돔 족속의 연합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수금을 연주하는 성전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에 이 노래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초기(기원전 537-515년)에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불렀을 것입니다. 후대 유다교 전통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념하는 의식에서 이 시편을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례에서는 저주를 담고 있는 7-9절은 기도로 바치지 않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1절)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라는 말은 유배를 암시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이 절은 나라와 성전을 잃은 그들의 참담한 심정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향수에 젖어 울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인 크바르 강 근처에 거주했습니다. (에제 1, 1-3) 그들은 잡혀간 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1열왕 8, 48)

"거기에"라는 표현으로 보아 시인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유배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암시합니다. "거기"는 시온을 생각하며 탄식과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곳입니다. 그래서 "우네"를 과거로 ‘울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다"는 말은 원래 '기억하다'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온의 처참했던 멸망을 기억하면서 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5절)

시인은 자신을 저주하는 형식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에게 직접 잊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 곧 주님께 대한 충성의 척도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현존하신다고 믿는 하느님의 성읍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충성심을 잃으면 자기 오른손, 곧 자신에게서 중요한 기능을 잃어도 좋다고 합니다.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9절)

시인의 감정이 절정에 달하여 직접적으로 보복을 호소합니다. 그의 고통과 분노가 증오심과 잔인성으로 표출됩니다. 여기서 행복에 대한 표현은 저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저주는 예루살렘에서 행한 바빌론인들의 잔악한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압제자들에게도 그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바위에 메어치는"이라는 표현은 고대 근동 지방의 전쟁에서 도시를 함락한 후 강탈과 파괴가 빈번했음을 가리킵니다. 어린이를 살육하는 것은 주민들을 멸망시켜 없애기 위한 군사정책이었습니다. 이런 야만적인 관습은 다음 세대에까지 전쟁의 화를 미치게 함으로써 완전한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유다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저주를 기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당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자기들이 당한 일 자체가 매우 잘못된 것이며 피해자와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심판이나 보복을 하셔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이런 저주 표현 이면에 압제자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즉각적으로 실현되기를 간구합니다.

시편 137편은 포로로 잡혀갔던 시인의 시온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그 기초까지 파괴되었고, 시인은 유배라는 쓰라리고 처절한 고통의 체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슬픔은 단순한 향수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렸던 곳인 시온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 시편은 보복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것을 약속하는 유배 시기 및 유배 시기 이후의 예언자들의 신탁과 일치합니다. (이사 13, 16; 14, 22) 시편 안에 이런 종류의 격렬한 표현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하느님도 그런 악을 싫어하신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시인이 원수에 대해 저주를 기원하는 것은 시온에 대한 애끓는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그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의 원수에 대한 저주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에 거슬립니다. 의로운 분노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복수심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칫 심각한 죄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