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순수녀의 시편 묵상

제23강 시편 130편 깊은 곳에서 (De Profundis)

재생 시간 : 08:42|2013-01-24|VIEW : 2,365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1-2절) 시편 130편은 개인 탄원 시편이며 참회 시편에 속합니다. 이 시편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편은 절망과 확신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람들은 이 시편에서 큰 위로...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1-2절)

시편 130편은 개인 탄원 시편이며 참회 시편에 속합니다. 이 시편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편은 절망과 확신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람들은 이 시편에서 큰 위로와 희망을 얻습니다. 이 시편에는 시인의 절망감이 깊게 나타나는데 그의 절망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죄와 백성의 죄가 고백됩니다. 시인은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느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애를 신뢰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고대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임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몹시 아팠을 때 이 시편의 4절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는 말씀을 침상 벽에 써 놓고 날마다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1절)

"깊은 곳"의 장소는 은유적으로 자신이 처한 곤경의 상황이나 자기 혼자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깊은 곳"은 일반적으로 절망과 상실감을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역경'과 '시련'에 대한 은유로 쓰였습니다. 시인은 깊은 곳에 빠져 죽어가듯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림받았습니다. 이 "깊은 곳"은 사람이 견디기 힘든 환경․위험․고통의 심연입니다. (시편 69, 3) 시인의 고통이 깊은 혼돈의 바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나는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요나 2, 3-4) 사람의 구조의 손길이 닿기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이 어떻게든지 깊은 곳에, 또는 적어도 부르면 들리는 곳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깊은 곳"은 기도할 때에 자기를 내면화시킬 수 있는 단어입니다. 깊은 곳은 환자의 병, 억울한 자의 한, 실패한 자의 낙담들일 수 있습니다. "깊은 곳"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영적인 영혼의 깊은 어둠입니다. 어둠 속에서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뿐입니다. "부르짖음"은 긴급 구호 요청의 성격을 지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3절)

성경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3, 2; 잠언 20, 9) 그러므로 시인은 하느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인생입니다.

"감당하다"는 말은 '견디다'는 뜻이 아니라 '홀로 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제단의 불로 정화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사 6, 3-7)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표현은 죽음의 물살들 속에 휘말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깊은 절망감을 표현합니다. 절망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는 '죄'의 무게를 가장 힘들게 느낍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죄의 무게, 죄의 악순환을 표현합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시인들은 죄를 내리누르는 힘으로 느낍니다. (시편 38, 5) 어떤 시인은 죄가 파괴의 힘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40, 13) 그리고 죄악의 노예가 된 상태,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죄를 표현합니다. (로마 7장 참조)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4절)

"하느님께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느님 말고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것이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탈출 34, 6-7)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죄를 제거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죄의 고백 후에 용서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죄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십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죄를 묵과하는 것 이상입니다. 용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이들을 은총으로 돌봐 주심으로써 죄의 사슬을 끊어 줍니다. 계약이 파괴된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하느님은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는 신뢰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목적은 그분을 경외하게 함에 있습니다. 용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주님께 대해 더 큰 경외심(존경과 흠숭)과 신뢰를 갖게 합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5절)

"바라다", "희망을 두다"라는 낱말은 신뢰의 표현입니다. "바라다"를 두 번 반복하여 주님을 기다림이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희망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일에 마음을 두면 둘수록 우리는 더 불안해지고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두면 둘수록 우리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냥 하느님의 배에 우리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의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참회합니다. 그가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죄 때문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이 시편은 죄와 용서에 대해서 심오한 가르침을 줍니다. 시인은 죄가 그를 심하게 짓누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을 하느님은 용서하심을 믿습니다. 시인은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희망하면서 그분의 용서를 청합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그분을 더욱더 경외하게 됩니다. 시인은 하느님께서 죄인을 죽이기를 원하시지 않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렇게 하여 보다 큰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