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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베네딕투스 (Benedictus) 2

재생 시간 : 16:44|2011-02-26

2. 가르침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베네딕투스 규칙서』가 지닌 뛰어난 중용에 대하여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중용으로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었고, 수세기 동안 어떤 나라에서든지 적용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느님 찬미를 우선으로 하는 분별력과 중용의 정신을 담은 베네딕투스 규칙서는 서방 수도회의 모체가 되었다. 무엇보다 베네딕투스의 수...

2. 가르침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베네딕투스 규칙서』가 지닌 뛰어난 중용에 대하여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중용으로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었고, 수세기 동안 어떤 나라에서든지 적용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느님 찬미를 우선으로 하는 분별력과 중용의 정신을 담은 베네딕투스 규칙서는 서방 수도회의 모체가 되었다.

무엇보다 베네딕투스의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찾는 삶(Quaerere Deum)을 자신의 목적과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규칙서』머리말 1~2에서 잘 나타난다. “들어라,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어진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물러갔던 그분께 순종의 노고로 되돌아가거라.” 이 짧은 두 구절 안에 베네딕투스 영적 여정의 기본 골격이 다 담겨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명으로 인한 것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당신께로 불러주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찾는 삶이며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삶인 회개의 여정인 것이다. 순명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며,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투스는 성서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한다. 이것은 ‘복음의 인도함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규칙서』머리말 21)을 의미한다. 베네딕도는 바로 이를 위해 ‘주님을 섬기는 학원’(『규칙서』머리말 45)인 공동체 설립을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을 그 근본 목적으로 삼는 베네딕투스의 영적 가르침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즉 공동체 영성, 자아포기의 영성,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그리고 중용의 이상이다. 무엇보다 베네딕투스회 생활은 은수자들처럼 ‘혼자’가 아닌 ‘함께’ 생활한다. 곧 『규칙서』제1장에서 말하듯, “수도원 안에서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베네딕투스회는 다른 공동체와는 달리 공동생활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을 공동생활을 통하여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네딕토회의 3대 서원 중 하나인 정주(定住, stabilitas)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정주에는 외적 정주와 내적 정주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외적 정주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육체적으로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의 핵심은 마음의 편안함에 있다. 내적 정주는 마음을 순결하게 보존하고, 죄와 악습으로부터 항상 주의하며, 자신의 모든 처지와 상황에 만족하는 것으로 ‘마음의 정주’ 또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의 정주’라고도 한다. 외적 정주는 내적 정주를 지향하며 그것을 위한 하나의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내적 정주 없는 외적 정주는 참된 의미의 정주라 할 수 없다. 참된 의미의 정주는 내적 정주와 외적 정주를 모두 포함한다. 정주의 목표는,『규칙서』머리말에서 말하듯, “주님 나라 장막에 머무는 것”이요, “주님을 뵈옵는 것”이며, “주님 나라의 동거인이 되는 것”이다. 곧 수도자가 정주를 실천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 안에서 그분 나라에 머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순결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기에, 이 ‘마음의 순결’이 정주의 직접적 목표가 된다. 결국 정주란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 상태인 하느님 나라 장막에 머물고자 하는 궁극 목표에 이르기 위해 특정한 수도 공동체에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항구하게 머물면서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부단한 선행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마음의 순결로 자신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정주서원의 근본적 내용은 무엇보다 수도원의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에게 순명(oboedientia)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아빠스에 대한 순명은, 불순명으로 인한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순명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요구된다. 바로 여기서 베네딕투스 규칙서가 말하는 형제애가 나타난다. 형제들 간의 순명은 공동생활의 내적 원동력인 서로 섬기는 삶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투스는 주간 주방 봉사, 식당 독서 봉사, 성당에서 전례 봉사 등 여러 구체적 섬김을 통해서 모든 형제들이 큰 공로와 애덕을 닦게 된다고 한다. 결국 장상과 형제들에게 순명을 하기 위해서는 겸손의 덕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베네딕투스는『규칙서』제7장에서 겸손의 열두 단계를 길게 설명하면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겸손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참다운 ‘들음’에서 나오기에, 이 경청의 구체적 수행으로서 하느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행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포기의 영성이 등장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는『규칙서』4,10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베네딕도회의 삼대 서원인 ‘정주’와 ‘수도생활에의 정진’(conversatio morum) 그리고 ‘순명’ 서약인 것이다. 여기서 ‘수도생활에의 정진’은 세속적 생활양식을 버리고 수도승생활 양식을 받아들여 그것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도승 소명 전체와 관계되기 때문에 순명과 정주 서원의 기초가 되고 그 자체 안에 가난과 정결을 내포한다. 곧 ‘수도생활에의 정진’은 ‘악과의 싸움’, ‘덕에 나아감’이란 능동적 측면에서 볼 때 수도승을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투쟁’이다. 곧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고치고 그리스도교 덕행에 나아가기 위한 매일의 싸움에 투신하는 것이다. 또한 자아포기를 통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완성에로 나아갈 것을 약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아포기의 영성을 통해 또 다른 측면인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 나타난다.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규칙서 여러 곳(4,21; 5,2; 72,11)에서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그를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은 베네딕투스 규칙의 존재 이유이며 규율의 영혼과도 같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투스의 영적 가르침은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이 염격함과 유연함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는 중용의 영성을 제시한다. 이는 하느님의 일(Opus Dei)과 노동의 조화에서 잘 나타난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짧은 문장은, 비록『규칙서』에 나온 것이 아니라 9세기의 아니안느의 베네딕투스 때에 의해 나타나지만 베네딕투스회의 삶을 특징짓는다. 각 수도자가 개인적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원의 정주와 공동생활은 기도와 노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찾는 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도구는 성당에 모여 함께 거행하는 공동 기도이고, 또 다른 도구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규칙서』제43장은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교부들의 금언집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고대 수도승 작품들의 희랍에 본문 안에서 결코 전례나 시간경을 의미하지 않고 언제나 수도승생활의 전체 삶의 양식을 뜻하였다. 수도승이 되고 수도승으로 남아 있기 위하여 수행해야 하는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수도승이 매일 밤낮 수행해야 하는 다양한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이다. 그의 전 활동은 기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여기서 왜 베네딕투스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하느님의 일’이란 표현을 선호하였는지가 나타난다.

공동 기도를 하느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동기에서 나온다. 하나는 형제의 마음속에 부어진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하고 사심 없이 하느님을 위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다. 이는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규칙서 57,9) 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필요한 태도에 대해 베네딕투스는 겸손과 순명 그리고 탐욕에서의 자유를 언급한다. 겸손은 기술자로 하여금 일 자체에만 전념토록 하여, 노동이 기도가 되게 하고 하느님의 창조적 힘을 투과한다. 순명은 수도승이 노동에서 구현하려는 바를 따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말을 귀담아듣게끔 한다. 탐욕에서의 자유를 통해 수도승은 정직하게 일하게 된다. 결국 기도와 노동의 조화에 대한 가르침은 하느님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일치,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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