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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시인 정호승

재생 시간 : 02:08|2009-02-19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시인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시인 정호승 *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처럼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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