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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월) - <3> 6·25 전쟁, 피난 다니며 수업 이어간 소신학교

재생 시간 : 04:00|2020-07-13|VIEW : 117

7/13(월) - <3> 6·25 전쟁, 피난 다니며 수업 이어간 소신학교[앵커] 6·25 전쟁 당시 성직자들은 공산군에 납치되거나 피살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그렇다면 사제를 양성하던 소신학교는 어땠을까요?소신학교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는데요.전세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이어갔습니다.70년 전,...

7/13(월) - <3> 6·25 전쟁, 피난 다니며 수업 이어간 소신학교

[앵커] 6·25 전쟁 당시 성직자들은 공산군에 납치되거나 피살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제를 양성하던 소신학교는 어땠을까요?

소신학교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는데요.

전세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70년 전, 신학교로 가보겠습니다.

[기자] 6·25 전쟁 발발 이튿날인 1950년 6월 26일.

용산 소신학교에서는 평소처럼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국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에 학교에 학생들의 귀가를 요청했습니다.

서울과 근교에 사는 신학생들은 집으로 향했고, 지방 출신 신학생들은 피난을 준비했습니다.

지하실에서 밤을 지새운 신학생들은 학교에서 챙겨준 쌀을 들고 28일 새벽 길을 나섰습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그 때 당시에 성직자 대피령이라는 게 내렸다고 그래요. 공산군이 성직자를 먼저 공략한다고 하는 그런 대피령이 있었다고 해서 신부님들하고 신학생들한테는 당시 침대보가 천 같은 게 침대보가 있었다고 해요. 거기에 쌀 한 움큼씩 싸가지고 피난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장 이재현 신부와 교사 백남창 신부, 긴급 피난을 온 동성중학교 정진구 신부는 용산 소신학교를 지켰습니다.

피난 도중 돌아온 신학생들도 15명 정도 있었는데, 2005년 6월 19일자 평화신문에는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항식 씨의 증언이 실렸습니다.

<김항식 안드레아 / 6·25 전쟁 당시 소신학교 학생>
"이재현 신부님께서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9월 17일 새벽 갑자기 문을 열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후배를 통해 신부님에게 피신하시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뒷문에도 공산군이 와 있었고 백남창 신부님과 정진구 신부님이 먼저 체포됐습니다. 이재현 교장 신부님은 교장실에서 흔들림 없는 자세로 붙잡혀 강제 납치되셨습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교구는 소신학교 뒷수습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은데다 중공군까지 개입하면서, 서울에서 수업을 하긴 어려웠습니다.

결국 소신학교 본부와 교사 신부들은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1·4 후퇴를 전후해 속속 부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교구는 수업 재개를 위해 안전한 곳을 물색했고, 결국 1951년 1월 고심 끝에 제주도로 또다시 이동했습니다.

이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소신학교는 석 달 만인 1951년 4월 다시 본토로 돌아왔습니다.

임시교정을 마련하려면 학생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과 땅이 있어야 했습니다.

또 추후 서울 복귀를 위한 편의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난지로 낙점된 곳은 경남 밀양.

당시 밀양본당 주임 김영제 신부와 주민들은 소신학교 정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학생들은 흙벽돌과 군용 천막으로 만들어진 교실에서 사제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멈췄습니다.

소신학교의 서울 복귀가 논의됐고, 1953년 11월 6일 마침내 긴 피난 생활이 마무리됩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성소의 못자리를 이어가려고 했던 노력들.

덕분에 사제는 쉼 없이 배출됐고, 이는 한국 천주교회를 지탱해온 원동력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