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뉴스

5/14(목) - <1> 5·18, 사제가 탱크 앞에 나선 이유

재생 시간 : 04:04|2020-05-14|VIEW : 245

<1> 5·18, 사제가 탱크 앞에 나선 이유   오늘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도 광주 시민들 못지않게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와 함께하며, 대화를 통한 사회정의에 나섰는데요. 40년 전 상황을 재구성해봤습니다. =================...

<1> 5·18, 사제가 탱크 앞에 나선 이유

 

오늘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도 광주 시민들 못지않게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와 함께하며, 대화를 통한 사회정의에 나섰는데요.

40년 전 상황을 재구성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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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이 9일째에 접어든 1980년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의 탱크가 농성광장 쪽으로 진입합니다.

군인들은 기관총을 내걸고 시민을 향해 발포 태세를 취합니다.

 

이미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본 사제들은 전면에 나섰습니다.

"어른들이 총알받이로 나서자"는 김성용 신부의 말에,

조철현 신부를 비롯한 17명의 수습대책위원들은 맨손으로 탱크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전남도청에서 농성광장까지 이어진, 이른바 죽음의 행진입니다.

계엄군과 마주한 수습대책위원들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전했습니다.

탱크 동원을 사과하고, 경찰에게 치안을 맡기며, 시민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말 것 등입니다.

하지만 요구는 묵살됐습니다.

 

결국 김성용 신부는 진상을 알리기 위해 광주를 탈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김 신부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긴박한 광주 상황을 전했습니다.

조철현 신부는 그날 저녁 미사 강론에서

"광주 시민들은 오늘 밤 또다시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른다"며 흐느꼈습니다.

 

<김희중 대주교 / 광주대교구장>

"신부님들이 탱크 앞에 드러누워서 우리를 짓이기고 가라 그러면서 일시적으로 탱크를 저지시킨 그런 일도 있었고. 신부님들이 더 이상 큰 희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군, 소위 시민들이 갖고 있었던 총들을 신부님들이 전부 수거했습니다. 그래서 무기로서 맞서지 않고 비폭력 저항으로 우리가 맞서자."

 

하지만 27일 새벽, 계엄군은 ‘폭도소탕’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현장엔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가 있었습니다.

광주대교구 관할 성당을 통해 희생자를 파악하고, 음식을 나눴으며,

부상자 치료를 위한 헌혈에도 나섰습니다.

 

<김희중 대주교 / 광주대교구장>

"밥을 해놓고, 물을 가지고 오고, 헌혈을 하고 그러면서 아주 줄을 섰고, 넝마주이들도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이렇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것이 대동정신이 아닌가."

 

광천동성당 대건 안드레아 교육관에 있는 들불야학에서는

5·18의 진상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만들었습니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사제들이 계엄군에 체포되는 상황 속에서도

진실을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독일 공영방송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영상의 복사본도 만들어 유포했습니다.

 

<김희중 대주교 / 광주대교구장>

"독일 기자가 촬영했던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서 어렵사리 아주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서 한국에서 입수를 했습니다. 우리 교구에서. 가톨릭센터 지하에서 몇 날 며칠을 밤낮으로 비디오 몇 십 대 가져다 놓고 복사를 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그래서 그 비디오 테이프를 전국으로 다 뿌렸죠. 그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현상해서 가톨릭센터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와 사제들의 오월항쟁 체험담을 담은 「저항과 명상」.

가톨릭교회 활동을 중심으로 수집된 「광주의거 자료집」 등도

광주대교구 정평위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