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순수녀의 시편 묵상

제26강 시편 4편 주님이 주시는 기쁨

재생 시간 : 08:43|2013-02-01|VIEW : 3,720

"저들이 곡식과 햇포도주로 푸짐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당신께서는 제 마음에 베푸셨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저는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 (8-9절) 시편 4편은 전통적으로 개인 탄원 시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내용 면에서 보면 신뢰 시편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께 대한 강하고 확고한 신뢰심을 ...

"저들이 곡식과 햇포도주로 푸짐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당신께서는 제 마음에 베푸셨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저는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 (8-9절)

시편 4편은 전통적으로 개인 탄원 시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내용 면에서 보면 신뢰 시편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께 대한 강하고 확고한 신뢰심을 보여주며, 주님으로부터 응답받은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명예를 짓밟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잠잠하고 주님을 신뢰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는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주는 기쁨보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기쁨이 더 크다고 합니다. 또한 주님만이 그에게 참된 평안을 주심을 확신합니다.  

이 시편의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셀라"가 두 번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 시편은 전례 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셀라"는 칠십인역에서 '쉼'이나 '간주곡'으로 옮기지만 그 뜻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아침 기도로 사용된 3편 다음에 나오고, "잠이 든다"(9절)는 말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저녁 기도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아, 언제까지 내 명예를 짓밟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찾아다니려 하느냐? (3절)

여기서 시인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달아 하느님께로 돌아서도록 재촉합니다.

"사람들"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들'로서 일반인과는 다른 저명하고 유력한 사회 인사들을 일컫는 말로 추측됩니다. 그들은 사회의 높은 자들로 권세나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폭넓게 본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라는 말은 반대자들을 향한 시인의 항의를 암시합니다. 그들의 못된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헛된 것과 거짓을 추구하면서 시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그를 비난합니다. "헛된 것"과 "거짓"은 근거 없는 고발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헛된 것"은 '비우다'라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되어 '헛됨, 무가치함, 공허'를 뜻합니다. 이것은 빈 것에 사용되는 낱말로 이름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우상을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거짓"은 '거짓말, 속임, 그릇됨' 등의 의미가 있고, 기본적으로 참된 것이 아닌 것, 거짓된 것을 가리킵니다.

저들이 곡식과 햇포도주로 푸짐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당신께서는 제 마음에 베푸셨습니다. (8절)

"곡식과 햇포도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요 물질적인 부와 세상적인 기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물질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 어떤 부보다 귀함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시인은 주님께서 단순히 기쁨의 선물을 주셨다고 하지 않고 "마음에 기쁨"을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히브리 말 "기쁨"은 구약성경에서 마음(시편 19, 9)이나 영혼(시편 86, 4)과 관련되어 자주 사용되며, 이때는 마음의 내적인 상태의 기쁨을 말합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영구적인 기쁨입니다.  

마음의 기쁨은 자동차나 집, 옷이나 푸짐한 식탁에서 오지 않습니다. 물질에서 얻는 기쁨은 마음의 기쁨이 아니라 외적인 기쁨입니다. 시인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인 추수의 기쁨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추수가 주는 물질적 복의 기쁨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더 큽니다. 물질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기쁨은 지속적인 평안을 줍니다. 시인은 이 내적인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저는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 (9절)

이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평화를 노래하면서 확신과 신뢰의 고백으로 기도를 끝맺습니다.

"평안"을 뜻하는 히브리 말 '베타흐'는 '믿음·신뢰·안전'의 의미를 지닙니다. 칠십인역에서는 히브리 말 '바타흐' 동사를 '믿다'(피스테우에인)보다는 '희망하다'(엘피제인)로 옮깁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로 비롯되는 평안과 안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 말 '샬롬'은 '완전·성취·행복·안녕·안전·충만'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반대되는 용어가 전쟁과 전쟁 용어와 연결된 것들입니다. 잦은 전쟁의 파멸과 유배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시편 4편은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물질에서 오는 기쁨을 찾습니다. 물질이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지만 그런 기쁨은 영구적이지 못합니다.

이 시인은 물질적 부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에게는 물질적인 축복의 기쁨보다 영적인 기쁨이 더 소중합니다. 또한 그는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전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아무리 곡식을 창고에 많이 쌓아두고 안락한 삶을 노래한다고 하여도 그가 죽으면 그 물질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루카 12, 15)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이며,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 27)고 하십니다.

"저들이 곡식과 햇포도주로 푸짐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당신께서는 제 마음에 베푸셨습니다."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