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순수녀의 시편 묵상

제19강 시편 103편 잊을 수 없는 주님의 은혜

재생 시간 : 08:33|2013-01-18|VIEW : 3,574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2-3절) 시편 103편은 찬양 시편에 속하며 이어지는 찬양 시편 그룹(시편 103-107편)의 시작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1절에서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로 시작하여 22절에서 같은 말로 마칩니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2-3절)

시편 103편은 찬양 시편에 속하며 이어지는 찬양 시편 그룹(시편 103-107편)의 시작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1절에서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로 시작하여 22절에서 같은 말로 마칩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하느님께서 해 주신 일을 잊지 마라(2절)고 자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3.10.12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마땅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에 응답해야 합니다. (11.13.17절) 베풀어주시는 분에게 순종함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6절)

시인은 "모든 잘못"(3절)을 용서받고 "모든 아픔"(3절)을 치유 받아 육체적으로 회복된 상태입니다. (4-5절) 이 시편에서는 '덧없는 인생에 대한 탄원'(14-16절)과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애와 의로움'(17-18절)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배경은 병에 걸렸던 시인이 회복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2절)

시인은 자신에게 주님을 "찬미하여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찬미하기로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찬미하다"라는 히브리 말 '바락'은 기본적으로 '축복하다'는 뜻이며 권세를 가진 존귀한 사람을 온갖 예의를 갖추어 인정해 주고 높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영혼"은 '내 자신'과 같은 뜻입니다.

"그분께서 해 주신 일"은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일은 구체적으로 3-5절에 나오는 주님의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곧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며,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고, 네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게 하십니다." (3-5절)

주님의 은혜를 받은 시인은 자신에게 그 은혜를 "잊지 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와 찬양은 입은 은혜에 대해 한 번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기억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은 잘 잊어버리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자신에게 경고합니다.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진정 하느님을 잊고 말하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발달에 발맞추어 나타나는 현상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기억하고 찾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고 삶이 행복할 때에는 감사드리거나 우리의 충실함을 보여 드려야 할 필요성을 덜 느낍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잊지 못합니다. 찬양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힘입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3절)

시인이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치유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철학적․신학적 사고가 아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고', '낫게 하시어' 그를 회복시키시고 치유시키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시인은 '죄의 용서'와 '병 고침'을 제시합니다. 신학적으로 "잘못"과 "아픔", 곧 '죄'와 '병' 그리고 '용서'와 '회복'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을 죄의 결과 내지 벌로 생각했습니다. 죄와 병에서의 구원은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와 병은 가장 근본적인 고통입니다. 시인은 하느님이 이런 가장 근본적인 고통을 낫게 해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14절)

이 구절은 '하느님은 왜 자비로우신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자비로우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상함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됨됨이와 우리가 티끌 같은 존재임을 아십니다.

"우리의 됨됨이"는 '우리의 피조성', 곧 창세기 2장 7절의 흙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며 용서받아야 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아시고, 또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본질이 흙이고 나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자애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성경에서 "티끌"은 가장 보잘것없고 비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편 119, 25) 하느님의 선하심은 먼지 하나하나에게도 미칩니다. 티끌로 빚어져 다시 티끌로 돌아가는 인간이기에 하느님께서 더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집회 18, 8-14)

시편 103편은 고통을 통해 개인적인 감사에서 공동체적인 찬양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 각자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과 예물을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는 자기 권면은 전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됩니다. 찬양은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잘못을 용서하시고 병에서 낫게 하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속성에 근거하여 이런 자애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계약을 지키고 주님의 규정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에 대한 응답이 바로 103편과 같은 모든 믿는 이의 찬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일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