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덕원의 순교자들] (39)신윤철 베드로 신부
‘착한 양들과 함께 있겠다’며 죽음 선택한 목자
2014. 07. 06발행 [12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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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양들과 함께 있겠다’며 죽음 선택한 목자


▲ 1935년 연길수도원에서 독서직을 받으러 가는 신윤철(초를 들고 있는 이) 베드로.

▲ 1938년 3월21일 연길수도원 성당에서 교구장 브레허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신윤철 신부(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 1937년 9월 8일 부제품을 받은 신윤철 베드로. 영대를 손에 차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신윤철 (申允鐵, 베드로) 신부



▲출생: 1906년 5월 28일 황해도 신천

▲세례명: 베드로

▲소속: 연길교구

▲사제수품: 1938년 3월 21일

▲소임: 연길교구 팔도구 보좌, 왕청 준본당 주임, 평양교구 대신리 보좌, 서울대교구 장련 주임

▲체포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24일 장련성당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해주(추정)





신윤철(베드로) 신부는 1906년 5월 28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간도성 팔도구 인근 하평에서 성장했다. 연길에서 북서쪽으로 23㎞ 떨어진 용정시 조양천진 팔도구는 ‘간도의 로마’라 불리던 곳이다. 1921년 성 베네딕도회 독일 선교사들이 이곳에 왔을 때 팔도구 주민 4000명 가운데 절반이 가톨릭 신자였고 이곳 출신 한국인 이민자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910년 9월 팔도구본당을 설립해 사목했으나 1919년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사제가 마적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후 성 베네딕도회가 연길 지역 관할을 맡으면서 독일 선교사들이 사목했다. 팔도구 본당은 신윤철 신부와 함께 시복 재판 중인 하느님의 종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와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21년 6월부터 1923년 봄까지 팔도구와 삼원봉에서 사목했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영하 30℃가 넘는 한 겨울밤 미사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연길교구 팔도구 출신 사제

열심한 아버지 밑에서 신앙을 키운 신윤철은 연길교구 소속으로 덕원신학교에서 소신학교 과정과 대신학교 과정을 공부한 후 1938년 3월 21일 연길수도원 대성당에서 3일 전 주교품을 받은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같은 팔도구본당 출신이지만 원산교구로 입적한 임화길(안드레아) 부제도 같은 날 덕원수도원에서 사제로 수품했다. 당시 팔도구본당 주임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는 신윤철 신부의 첫미사 장면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밝히고 있다.

“부활 주일은 큰 잔칫날이었다. 그날 우리 공동체의 첫아들들이 고향에서 거룩한 첫미사를 봉헌했다. 신윤철 베드로 신부는 성 베네딕토 축일에 연길에서, 임화길 안드레아 신부는 네 번째 금식 주일 전 토요일에 덕원에서 각기 사제품을 받았다. 신 베드로 신부는 그 다음 날 가까운 친척들에 에워싸인 가운데 연길수도원 성당에서 거룩한 첫미사를 봉헌했다. 역시 이곳 출신이지만 활동 지역으로 원산대목구를 선택한 임화길 신부도 첫미사를 우리 성당에서 봉헌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신 베드로 신부는 두 번째 미사를 드렸다. 토요일 오후 경사스러운 종소리가 두 새 사제의 도착을 알렸다. 학생들이 환영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정렬했다. 성대한 행렬이 성당으로 향했다. 하느님의 집이 금방 신자들로 가득 찼다. 모두 무릎을 꿇고 새 사제의 축복을 받을 때 감동 어린 정적이 흘렀다.”(팔도구 연대기 중에서)

이때가 팔도구본당의 전성기였다. 1940년대 들면서 일본 관동군과 중국 공산 정부가 차례로 이 지역을 봉쇄해 신자 수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남았던 독일 선교사들도 1953년 팔도구에서 추방됐다.



시대의 거센 물결 속에서

신윤철 신부는 사목 첫 소임지로 출신 본당인 팔도구 보좌로 발령받아 1938년 7월 15일부터 사목활동을 하면서 학교 일을 도왔다. 이후 1943년 왕청 준본당 초대 주임 사제로 발령받아 북간도 한인 신자들을 사목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북간도를 점령한 소련군은 성당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팔도구성당에서는 엔젤마로 첼너 수사가 소련군에게 살해당했다. 또 중국 공산당원들은 간도 각지 성당을 찾아다니며 장개석 추종자를 색출해 사살하고 성당 제단 십자가를 떼어 부수고 예식서를 불태웠다.

신 신부도 1945년 만주에 진입한 소련군이 연길의 한국인 신부들을 체포했을 때 같이 체포돼 한동안 구금돼 있다가 풀려났다.

“공기를 가르며 생사람 몸을 내리치는 소리, 그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두려움에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비명과 신음, 끙끙 앓는 소리가 이어졌다. 구타 소리는 빈번히 들려왔다. 듣지 않으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도 끈으로 목이 조인 것처럼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저마다 알아서 마음을 추스르는 수밖에 없었다.”(연길수도원 연대기 중에서)

1946년 연길의 독일인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강제로 체포돼 남평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때 남은 한국인 사제들은 독일인 사제들을 대신해 빈 본당을 지켰는데 신윤철 신부는 명월구본당을 맡았다. 신 신부는 이전 소임지인 백초구 왕청본당에서 짐을 가져오려 했다. 이때 신민주주의를 표방한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또다시 체포돼 인민재판을 받고 공개처형을 선고받았다. 왕청본당 신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 신부와 세르바시오 루드비히 신부를 나무에 매달아 몽둥이로 집단 구타를 했다. 신 신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루드비히 신부는 매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뒀다. 극적으로 사지에서 탈출한 신 신부는 연길교구장 브레허 주교 아빠스의 지시로 평양교구로 남행을 결행했다.



남하하던 중 1948년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의 배려로 평양 대신리본당에서 박용옥(티모테오) 신부 보좌로 잠시 사목하다 같은 해 9월 사리원본당 주임 겸 교구장 대리 박우철 신부 배려로 공석 중인 황해도 장련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신 신부는 장련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안 미사 강론 때마다 반유물론적인 내용을 자주 언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년 신자들이 인민군에 입대하는 것을 만류해 늘 공산당의 감시 대상이 됐다.

“착한 양들과 함께 있겠다”며 끝까지 본당을 떠나지 않았던 신윤철 신부는 결국 1950년 6월 24일 밤, 정치보위부원 김주성과 내무서원 임만종에게 장련성당에서 체포돼 장련내무서로 강제 연행된 후 어디론가 끌려가 살해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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